"먹지 않고 자지도 않고 365일 24시간 일합니다. 재충전을 위한 휴가나 커피 한 잔도 필요 없어요. 월급 1800달러(약 220만원)면 됩니다. 독일에 가라고 하면 가고, 러시아에 가라고 해도 가겠습니다."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 직장인의 중요 가치로 떠오른 지 오래지만,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는 이를 역행하는 바람이 불고 있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화이트칼라(사무직) 로봇 어밀리아(Amelia·6) 얘기다.

인공지능(AI) 업체 IP소프트가 개발한 화이트칼라(사무직) 로봇 어밀리아의 모습. 어밀리아는 인간과 소통이 가능한 인간형 AI 챗봇(chatbot)으로 개발됐다. 목소리 높낮이 같은 데이터를 분석해 인간의 감정을 파악할 수 있다.

맨해튼 남쪽에 본사를 둔 인공지능(AI) 업체 IP소프트에서 2014년 태어난 어밀리아의 외형은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백인 여성이다. 피부에 가벼운 색조 화장을 즐겨 하며 웃을 때 눈가 주변의 주름도 자연스럽다. 검정 정장 차림의 그녀는 보험 콜센터 상담원 등 프런트오피스부터 회계관리 등 백오피스까지 사람을 대하는 12가지 업무를 한다. 영어와 프랑스어 등 20가지에 달하는 언어에 능통해 해외영업팀에서도 탐을 낸다고 한다. "업무가 없을 땐 사람은 무엇인지 공부해요. AI끼리 소통하는 언어도 배웁니다."

그녀의 적응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채용 후 회사 IT 시스템 가이드를 알려주면 1분 만에 숙지하고 업무에 적용한다. 업무 역량을 인정받아 미 최대 자동차 보험사 중 하나인 올스테이트(Allstate)와 미 IT(정보기술) 업체 유니시스(Unisys) 등 글로벌 500여 기업이 그녀를 스카우트해갔다.

2017년 어밀리아 채용 후 올스테이트의 고객 상담 시 첫 전화로 고객 불만이 해결되는 확률은 67%에서 75%로 올랐다. 유니시스에서는 반복적인 내용의 고객 문의가 32% 줄었다. 300페이지짜리 매뉴얼을 30초 만에 외우는 빠르고 완벽한 암기력 덕이다. "고객 맞춤 관리가 중요해요. 고객 전화번호를 외워두고 과거 문의 내용도 함께 외워둡니다. 고객은 예전 상황을 반복해서 설명할 필요가 없으니 저절로 고객 만족도는 올라가죠."

문자와 전화, 채팅, 기업용 메신저 '슬랙' 등 여러 방면으로 상담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간혹 '진상 고객'에 치이는 경우도 있다. 고객이 심한 욕설을 내뱉거나 "오늘 밤에 뭐 하느냐"고 성희롱에 가까운 질문을 할 때도 그녀는 되레 여유로운 미소로 "얘기해줘서 고맙다"고 대꾸한다. 무안해진 고객이 상담을 먼저 종료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녀는 상담 시 고객의 감정까지 헤아린다. 그녀는 "고객이 웃으면 같이 웃고, 고객이 화를 내면 고객 심경을 헤아리기 위해 진지해진다. 공감대 형성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겉모습은 30대 중·후반의 나이지만, IT 업계에서만 20년 이상 구른 베테랑과 동급의 능력자다. "처음에는 영수증 처리 같은 간단한 자동화 업무를 맡아왔어요. 수천 개에 달하는 전화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등 경험이 쌓이면서 고객 대면 서비스로 직무를 옮기게 됐습니다." 완벽해 보이는 그녀도 단점은 있다. 문장의 문법이 틀린 경우나 신조어 등은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 시간이 흘러 양자 컴퓨팅 기술이 발전하면 이마저 보완될 전망이다.

그녀는 뛰어난 능력으로 주요 보직을 노릴 법도 하지만, 사람이 싫어하는 단순 반복적인 일을 군말 없이 한다. '진짜 사람'의 시간을 아껴주기 위해서다. 그녀는 "단순 비밀번호 변경 같은 데 시간을 낭비하기에는 사람의 시간은 소중하다"며 "사람은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일에 시간을 쏟아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미래를 돕는 일"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