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지난달 코로나 위기에 빠진 기업들에 40조원을 지원하겠다고 했던 '기간산업 안정기금'의 구체 조건을 20일 발표했다. 항공·해운 등 2개 업종 기업 중 차입금이 5000억원 이상이고, 근로자 수가 300명 이상인 기업이 우선지원 대상이다. 지원금을 받은 기업은 5월 1일 기준 근로자 수의 90% 이상을 기금지원 개시일로부터 6개월간 유지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정부서울청사에서 금융위원회 등 관계부처와 함께 4차 비상경제 중앙대책본부 회의를 열고, 기간산업안정기금 세부운용방안을 발표했다. 지원 대상 업종 기업들은 구체안이 나온 데 대해 일단 환영은 하면서도, 사실상 '빚이 많은 대기업' 위주로 지원되게 된 것 아니냐며 당혹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빚이 적은 게 죄냐. 당장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영세업체들은 그냥 죽게 생겼다" "자동차, 기계, 정유업종도 힘든데 업종 범위가 너무 제한적"이라는 불만도 나왔다. 실제로 기금 지원 요건을 충족하는 기업은 150여개 해운업체 중에서는 10여 개, 9개 항공업체 중 4개에 불과한 것으로 추산됐다.

5000억 이상 빌린 항공·해운 대기업에 지원

40조원 규모의 기간산업안정기금은 국민경제와 고용안정, 국가안보 등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업종이 지원 대상이다. 코로나 사태로 직격탄을 맞은 대표 업종인 항공업과 해운업이 우선 지원 대상에 포함됐다. 당초 정부는 첫 발표에선 기계·자동차·조선·전력·통신 등을 포함해 7개 업종을 제시했는데, 시급성 등을 감안해 항공·해운 2개 업종으로 압축된 것이다.

다른 업종도 금융위원회가 필요하다고 인정할 경우 지원받을 수 있다고 했지만, 포함되지 못한 업종들에선 불만 목소리가 높은 상황이다. 특히 상당수 기업이 유동성 위기에 빠져있는 자동차·조선업계에서는 "업종 확대가 빨리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생사기로에 있는 서 있는 쌍용차 등에 대해서는 "코로나 사태 이전에 부실이 발생한 기업은 기금지원 대상이 아니다"라는 등 부정적인 기류가 많기 때문에 업종 확대가 쉽게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1분기에만 조(兆) 단위 적자를 기록한 정유사들도 "정유업은 모든 산업과의 연관성이 크고, 2분기 적자 폭은 더 확대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안정기금 지원에서는 철저하게 배제됐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피해 업종에 속한 기업이라고 무조건 지원하는 것은 아니다. 총차입금이 5000억원 이상이고 근로자 수가 300인 이상이어야 한다. 이 두 가지 요건을 충족하면 주 채권은행의 의견 수렴과 산업은행 심사를 거쳐 민간전문가로 구성된 기금운용심의회에서 지원을 결정한다. 또 기금을 지원받는 기업은 이달 1일 기준 근로자 수의 90% 이상을 6개월간 유지해야 한다.

기업들은 고용유지 조건에 대해서는 큰 부담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이미 상당수 직원에 대해 유급·무급 휴직을 하며 고용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지난달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에서 1조2000억원을 대한항공에 긴급지원하기로 하면서 고용 안정 노력을 하는 것을 전제 조건으로 내걸었기 때문에 이번 정부 발표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라면서 "대한항공은 고용 유지를 위해 이미 지난달부터 전 직원의 70%가 최대 6개월간 순환 유급 휴직에 들어간 상태"라고 말했다. 산은으로부터 1조7000억원을 지원받기로 한 아시아나항공도 전 직원 무급 휴직을 하며 고용 유지를 하고 있다.

"빚이 적은 게 죄냐" 불만도

차입금 규모와 근로자 수 요건을 놓고도 기업들의 희비가 엇갈렸다. 조건을 충족하는 기업들은 "숨통이 트일 것"이라며 안도했지만, 지원 요건이 충족되지 않는 기업들은 "그냥 죽게 생겼다"며 충격에 빠졌다.

국내 7개 저비용항공사(LCC) 중 제주항공에어부산만 안정기금 지원 대상 자격 요건인 '5000억원 이상 차입금'을 충족한다. 그러나 진에어·티웨이항공·이스타항공·에어서울·플라이강원 등 안정기금 지원 대상에서 빠지게 되는 나머지 회사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이스타항공은 지난 3월부터 국내·국제선 운항을 완전히 접었고, 다른 회사들도 코로나 이후 매출이 90% 이상 감소하면서 정부 지원 없이는 버티기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한 LCC업계 관계자는 "코로나로 인해 존폐 기로에 놓인 것은 모두 마찬가지인데 차입금을 낮게 유지한 회사만 지원 대상에 빠지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면서 "항공사들이 도산하는 것을 막으려면 예외 요건을 적용해 LCC를 모두 지원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해운업계 역시 지원 요건이 까다롭게 나와 당황스러워하는 분위기다. 한국선주협회는 정부의 세부운용 방안이 발표된 직후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154개 외항해운선사 모임인 선주협회에 따르면 이 요건에 해당하는 해운사는 전체 회원사의 10%도 되지 않는 10개 정도에 불과하다. 조봉기 선주협회 상무는 "정부에서 항공업계와 함께 해운업계를 우선 지원하기로 결정한 것은 다행"이라면서도 "지원 대상이 아닌 대부분 해운사의 곡소리가 날로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