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쓸 때면 항상 부사어에 발이 걸린다. 남용되는 그것들은 군살처럼 무겁거나 헛꽃처럼 장황하여 불편하고 의심스럽다. 그러면서도 에두르고 수식하고 더듬으며 부언하는, 내 식의 부사어 사용 방식에서 헤어 나오는 일은 늘 어렵다. 그런 중에 비교적 저항감 없이 쓰는 것이 ‘물끄러미’ ‘가만히’ 같은 입속말로 속삭여도 될 만큼 울림도 강도도 작은 말들이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마음에는 대상에 대한 억압과 폭력이나 평가, 비난이 없다. 간음한 여인과 그녀를 끌고 온 기세등등한 사람들을 예수님은 아무 말씀 없이 물끄러미 바라보신다. '어린아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김수영 시인은 그렇게 '물끄러미' 팽이 돌리는 아이를 바라본다.

오정희 소설가

간절하고 처연하고 애틋한 마음이 너무 깊어서, 신기해서, 다가가고 싶어서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을 때는 얼마나 많은가. 인생이라는 지난한 과업을 힘겹게 치러 나가는 자식들을 어머니는 안타까움과 무력감과 사랑, 슬픔이 뭉뚱그려진 측은지심으로 물끄러미 쓰다듬고 품어준다. 깊은 밤 어둠 속에서 산과 마을과 짐승의 눈처럼 흐린 불빛 비치는 나의 집을 물끄러미 바라보노라면 세상에 깃들어 있는 모든 것의 경계가 사라진다.

이른 봄 부엌 환풍기 안의 둥지에서 부화한 새끼가 어미의 인도로 둥지를 떠나는 첫 비행을, 그 불안과 주저와 작별과 자유의 날갯짓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사랑하지만 엄연한 개별자이며 필멸의 존재인 우리에게는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는 시간이 필히 오게 마련이라는 것을 아프게 자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