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에 떠는 지도자, 인조

1627년 정묘년 1월 13일 후금 기병대 3만 병력이 압록강을 건넜다. 이들이 의주성 밖에서 항복을 요구할 때 부윤 이완은 술에 취해 인사불성 상태였다. 이순신의 조카로서, 정유재란 노량해전에서 총에 맞은 삼촌을 이어 지휘했던 용장이었다. 그 무공이 무색했다. 이완이 북을 치며 군사를 모았으나 '오랫동안 이완이 군사들로부터 마음을 잃어 적병이 강을 건너자 군사와 백성 모두 달아나고 말았다.' 이완은 분전 끝에 전사했다.

2월 나라에 이상한 소문이 퍼졌다. '우리(후금)는 오로지 옛 왕 일을 복수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 것이다(今日之事 專爲前王復仇·금일지사 전위전왕복구).' 4년 전 광해군을 끌어내린 인조반정의 부당함을 따지고, 나아가 군사들을 징집 해제하고 10년 동안 집으로 돌려보내겠다(十年復戶·십년복호)고 했다.('조야기문·朝野記聞' 권5 정묘노란)

얼토당토않은 말이었지만 인조에게는 독화살 같았다. 자기 권력의 불안한 정통성과 돌아선 민심을 정통으로 저격한 소문이었으니까. 그때 인조는 강화도에 있었고, 소현세자는 전주에서 '분조(分朝·비상시 조정을 대신한 임시정부)를 지휘하고 있었다.

복수 더하기 복수, 인조반정

1623년 인조반정은 능양군 이종과 서인 세력의 연합 쿠데타였다. 능양군의 복수극이요 서인이 벼르던 권력 복귀전이다.

경기도 파주에 있는 인조릉, 장릉.

1615년 광해군은 서울 새문안에 있는 정원군 집에 왕기(王氣)가 서려 있다며 집을 빼앗았다. 정원군은 광해군 동생이자 인조 친아버지다. 그해 광해군은 정원군의 친아들이자 인조의 동생 능창군을 역모 혐의를 씌워 유배 보냈다. 능창군은 강화도 교동도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광해군은 정원군이 살던 집을 헐고 경덕궁을 지었다.(1615년 11월 17일 '광해군일기') 그 궁궐이 지금 경희궁이다. 집을 빼앗기고 동생이 강제 자살 당한 능양군 이종은 이를 갈았다.

그 능양군을 앞세워 선조 말기에 몰락했던 서인 세력이 일으킨 사건이 인조반정이었다. 인조는 실질적인 주도자임을 자처하며 반군을 앞에서 지휘했다. 복잡하고 불우한 가정사를 일거에 만회한 복수극이었다.

하지만 경운궁(덕수궁)에 11년째 유폐돼 있던 인목왕후가 정권 교체를 허락해야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들은 그날 밤 경운궁으로 가 왕후를 창덕궁으로 데려왔다. 대비가 된 왕후가 입을 열었다. "내 손으로 광해와 그 아들 목을 잘라 혼령에게 제사를 지내려 한다(願親斫渠父子之頭 以祭亡靈·원친작거부자지두 이제망령)."(1623년 3월 13일 '인조실록')

권위 없는 반정 정권

인조릉 비석.

인조는 왕권이 목적이었고, 인목대비는 광해의 목이 목적이었고, 서인은 권력이 목적이었다. 폐모살제(廢母殺弟·인목왕후 폐위와 동생 영창대군 살해)의 패륜과 사대 본국 명나라에 대한 배신 심판 같은 거창한 목적은 없었다. 복수와 복수, 그리고 권력에 대한 오랜 갈증이 결합한 쿠데타에 불과했다. 목적이 죄다 달랐으니 정권도 엉망진창이었다.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왕을 바꾸었다는 소리에 모두 놀라 동요했다. 정권은 이를 힘으로 누를 수 없어서 이루 말할 수 없이 어려웠다. 그래서 남인 원로인 오리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등용하자 그제야 인심이 안정됐다.(김장생, '사계전서·沙溪全書' 부록 연보) 그런데 4년 뒤 정묘호란이 터진 것이다.

정묘호란과 세자의 분조

호란 때 소현세자는 열다섯 살이었다. 개전 직후 인조는 대신들 청을 수용해 분조(分朝)를 허락했다. 임진왜란 때 광해군의 분조에 이은 두 번째 분조다. 인조는 체찰사 이원익과 좌의정 신흠을 포함한 조정 관료 26명을 대거 분조에 포함시켰다. 자신은 강화도로 도망갔다.

그해 1월 24일 서울을 떠난 세자는 3월 23일 강화도로 복귀할 때까지 이들과 함께 민심 안정이라는 비상 대책을 성실하게 수행했다. 아버지 명에 따라 세금 부과의 근거가 되는 호패를 불태우고 노동 징발도 되도록 줄여줬다. 대신들과 경서를 읽는 세자 교육도 빼지 않았다.(성당제, '정묘호란시 소현분조와 세자의 역할', 규장각, 2007)

조선의 세자 교육은 시강원(侍講院) 소관이다. 소현세자는 이동식 시강원 교육은 물론 전쟁이라는 어마어마한 현장 교육까지 체험한 권력 후계자가 되었다. 전쟁은 두 달 만에 끝났다. 세자는 후금의 동생 나라가 된 조선 조정으로 복귀했다.

세자빈 강씨와 물실국혼(勿失國婚)

그리고 그해 7월 인조가 남인 윤의립의 딸을 세자빈으로 정했다. 서인들이 벌떼처럼 반대했다. 사간 이상급은 "역적의 친척 딸이니 국혼(國婚)은 불가하다"고 주장했다. 인조가 "이미 정혼(定婚)이 내 뜻인데 어찌 감히!"하며 화를 냈다. 이상급이 말했다. "신(臣)을 파직하시라." 인조는 파직시키지 못했다. 김자점, 심명세, 윤방, 이정구 같은 반정 공신을 포함한 서인 전원이 반대했다. "혼인은 반드시 그 부모가 주관한다"고 인조가 반박했다. 서인들은 "국혼은 대신과 반드시 상의한다"고 재반박했다.(1625년 7월 28일 '인조실록')

경기도 광명시에 있는 소현세자빈 강빈의 영회원. 일반에 개방되지 않았다. 정통성이 없는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는 두 호란을 거치며 극심한 권력 컴플렉스에 시달렸다. 1645년 세자의 돌연사(혹은 독살) 이후 인조는 자신이 세자로 만든 봉림대군을 위해 왕실 맏며느리인 강빈을 사사하고 세 손자는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잘못된 권력의 잘못된 질투, 그 잘못을 덮으려는 잘못된 결정이 만든 비극이다.

반정 직후 서인은 두 가지 밀약을 맺었다.'인력은 이때까지 권력에서 배제됐던 서인 세력에서 충원하고(崇用山林·숭용산림)' '왕비는 서인 가문에서 낸다(勿失國婚·물실국혼).'(남하정, '동소만록', 1740) 마르고 닳도록 권력을 누리겠다는 의지다.

결국 두 달 뒤 인조는 서인인 승지 강석기의 둘째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했다. 서인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서인의 압승이었다.

병자호란, 질투의 증폭

1637년 1월 30일 두 번째 호란을 당하고 인조는 항복했다. 한 번에 세 번 씩 이마를 아홉 차례 땅에 찧는 삼궤구고두례를 행했다. 모든 의식이 끝났지만 인조는 밭 한가운데 앉아 일어나지 못했다. 청 황제 홍타이지는 해질 무렵이 된 뒤에야 귀경을 허락했다. 나루터에는 빈 배만 두 척 떠 있었다. 백관이 서로 먼저 타려고 인조 옷깃을 잡아당겼다.

소현세자는 청 진영에 머물다 심양으로 떠났다.(1637년 1월 30일 '인조실록') 분조 시절과 달리 심양에는 세자를 가르치는 시강원 관원만 있었다. 세자에게 정책을 조언하거나 행동을 통제할 관리는 없었다. 청나라 요구와 조선의 요구 사이에서 세자는 갖은 국사(國事)를 스스로 판단하고 실천했다.〈2020년 5월 12일 '땅의 역사' 참조〉

광명시에 있는 강빈의 영회원. 이곳은 강씨의 선산인 금천땅이다. 영회원은 조선왕조 내내 ‘묘’로 불리다 고종때 ‘원’으로 승격됐다. 고양시에 있는 남편 소현세자의 소경원처럼 정자각은 사라지고 없다.

오랑캐에게 고개 숙인 인조를 사람들은 '오군(汚君)'이라 불렀다. '더러운 군주'라는 뜻이다.(김영조, '망와선생문집'4 대사헌 사직의 소) 관직을 받고도 핑계를 대고 낙향하거나 어사로 임명되고도 상소를 하고는 도망간 자가 속출했다.(1637년 9월 10일 '인조실록') 끝없이 이어지는 권위 실추는 콤플렉스로 변했다.

삼전도 항복 석 달 뒤 청나라로 떠나는 사신들에게 인조가 당부했다. "적에게 인질로 잡혔으면 고생을 해야 하는데 관리들이 술도 마시고 집도 정상적이라면 잘못이다. 반드시 단속하라."(1637년 4월 18일 '승정원일기') 청나라에서는 "세자로 왕을 교체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1639년 7월 2일 등 '인조실록')

아버지 상 참석 금지당한 딸

1645년 영구 귀국 전 세자는 두 번 조선을 방문했다. 1640년 인조가 아플 때, 1644년 강빈 아버지 강석기 문상을 위해서였다. 인조는 세자 부부를 공식적으로 마중하지 말라고 어명을 내리는가 하면(1640년 윤1월 5일 '인조실록') 강빈에게는 아버지 문상을 하지 못하도록 명하기도 했다. 강빈은 살아 있는 어머니도 만나지 못하고 심양으로 돌아갔다. (1644년 2월 10일 '인조실록') 영구귀국한 세자는 두 달 뒤 급사(急死)했다. 인조는 세자 신분에 걸맞은 공식 장례식을 대폭 축소하고, 상복을 입는 기간도 1년에서 7일로 줄여버렸다.(1645년 5월 28일 등 '인조실록') 그리고 둘째아들 봉림대군을 세자로 전격 선정했다.

"후환을 제거한다"

그리고 이듬해 며느리에게 사약을 내렸다. 모든, 말 그대로 조정에 있는 모든 대신이 직위와 목숨을 걸고 반대했지만 인조는 처형을 강행했다.

강빈은 막강한 권한을 가진 조선 왕실의 총부(冢婦)였다. 총부는 죽은 남편을 대신하는 종가와 가문의 맏며느리다. 재산을 관장하고 가계 계승자를 고르는 입후권(立後權)을 가진 여자다. 그 여자, 강빈이 살아 있는 한 봉림대군의 미래는 장담할 수 없었다. 잘못된 질투에서 비롯된 잘못된 선택을, 인조는 더 잘못된 결정으로 덮어버린 것이다. 명분은 '반역'이었다.

"이 여자가 귀국할 때에 금백을 많이 싣고 왔으니, 이것을 뿌린다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용렬하고 무식해 재물에 탐이 나서 의리를 망각한 자들은 꾐을 당할 리도 없지 않을 것이다." 인조 또한 무리임을 알고 있었다. "국문할 때에 별로 자복한 사람이 없었지만 후일 반드시 걱정거리가 될 것이기 때문에 기필코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다."(1646년 2월 7일 '인조실록') 듣고 있던 간신 김자점이 잽싸게 거들었다. "심양에서도 강빈은 세자 대신 장계를 맘대로 고쳤다고 들었나이다." 강빈은 한 달 뒤 전격적으로 사약을 받고 죽었다.

복수극으로 시작된 반정(反正)의 부당함을 덮지 못한 것이다. 사대(事大)를 기치로 내건 반정 지휘자는 오랑캐에게 고개를 숙였다. 더러워진 권위를 며느리 살해라는 패륜(悖倫)으로 덮으려 했다. 양대 반정 명분을 스스로 버렸다. 위세에 눌린 서인 정권은 타깃을 바꿨다. 차기 권력자, 효종이었다. 그때 강빈은 한번 더 죽어야 했다.

〈다음 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