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처음 증언한 것으로 알려져있지만, 사실 그보다 16년 전 배봉기 할머니의 고백이 있었다. 배 할머니는 1943년 “누워만 있어도 입으로 바나나가 떨어지는 곳에 간다”는 말에 혹해 일본 오키나와로 건너가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 광복 후에도 오키나와에 머물렀던 할머니는 1972년 미국이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한 뒤 일본 영주권을 신청했다. 그러려면 1945년 8월 15일 이전 위안부로 일본에 입국한 사실을 털어놓아야 했다. 이 사연이 일본 신문에 보도된 것이 1975년이다.

▶일제는 1943년 이화여전 1학년생 전원에게서 '정신대 차출 동의서'를 받았다. 이를 피하려면 학교를 자퇴하는 수밖에 없었다. 윤정옥 이화여대 명예교수도 그때 자퇴서를 낸 학생 중 한 명이었다. 배봉기 할머니 이야기를 접한 1970년대 중반부터 위안부 연구를 시작한 그는 일본·중국·태국·미얀마 등을 다니며 위안부 100여 명을 만났고 1988년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주최 세미나에서 위안부의 실상을 국내에 처음으로 알렸다.

▶윤 교수는 1990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발족해 초대 대표를 맡았고 이듬해엔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이끌어냈다. 당시만 해도 정신대와 위안부는 혼동되고 있었다. 노동 착취를 당한 정신대와 성 착취를 당한 위안부를 따로 정의하는 데도 정대협의 노력이 있었다. '성 노예'나 '강간 피해자'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할머니들의 반대로 공식화하지는 못했다.

▶정대협 회원들은 1992년 1월 8일 미야자와 당시 일본 총리의 방한을 일주일 앞두고 일본 대사관 앞에 모여 "일본 정부는 정신대 희생자 위령비를 건립하라"고 외쳤다. 지난주 1439차를 맞은 수요집회의 시작이었다. 정대협의 수요집회는 전 세계에 일본의 만행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유엔을 비롯해 미국과 캐나다, 유럽 의회에서 일본 정부의 사과와 법적 배상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미국은 위안부 문제를 '20세기 최대 인신매매 사건'으로 규정했다.

▶정대협은 2018년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재단’과 통합해 지금의 ‘정의기억연대’가 됐다. 그런데 첫 수요집회 때부터 정대협 활동을 해왔고 대표까지 지낸 윤미향씨 행적 때문에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 피해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당했는데 돈 쓰고 국회의원 된 건 엉뚱한 사람들이다. 일본인들이 이를 보고 뭐라고 할지 한탄스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