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상무부는 15일(현지 시각) 제3국에서 제조한 반도체라도 미국 기술을 활용한 제품은 중국 화웨이에 팔지 못하게 하는 제재 조치를 발표했다. 첨단 반도체가 화웨이로 공급되는 것을 봉쇄하겠다는 의도다. 미국 정부는 "국가 안보를 최우선으로 고려한 결정"이라고 밝혔다. 중국 외교부와 상무부는 16·17일 연이어 "미국은 화웨이에 대한 비(非)합리적인 탄압을 중단하라" "중국 기업의 합법적인 권익을 지키기 위해 일체의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미국이 화웨이의 숨통을 끊을 제재안을 내놓자 중국이 맞대응하는 미중(美中) 격돌이 제3차 메모리 반도체 대전의 방아쇠를 당길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반도체가 전략 무기로 활용되면서 미국, 중국, 일본 등이 자국내 반도체 공장 확보에 사활을 거는 것이다. 코로나 사태로 세계 공급망 붕괴론이 불거지면서 '외국에 생산을 의존해선 위험하다'는 인식이 퍼진 데다, 화상회의 등 비(非)대면 서비스에 필수적인 메모리 반도체의 중요성이 각인된 것이다.

한국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장악한 메모리 반도체는 인공지능(AI), 빅데이터, 클라우드 등 미래 기술 경쟁에서 꼭 필요한 '무기'다. 철이 굴뚝 산업의 쌀인 것처럼 반도체는 테크 산업의 쌀이다. 임종인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전 대통령 안보 특보)는 "전통 산업에서 석유가 종종 무기로 쓰이듯, 지금은 메모리 반도체가 없으면 세상이 안 돌아간다"며 "메모리 반도체 공장이 웬만한 첨단 무기보다 무서운 시대"라고 말했다.

◇미·중 "반도체는 자국서 생산"

트럼프 행정부는 인텔, 삼성전자, 대만 TSMC에 미국 내 생산 시설을 확대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세 곳은 각각 중앙연산장치(CPU), 메모리, 파운드리(위탁 생산) 분야 세계 1위다. 압박을 못 이긴 대만 TSMC가 15일(현지 시각) 미국 애리조나주에 120억달러(약 14조8000억원)짜리 공장 신설 계획을 발표했다. 이 회사는 매출의 60%가 미국 기업에서 나온다. 삼성전자는 미국의 오스틴 파운드리 공장을 확대하라는 압박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트위터에 "중국이 최첨단 기술을 장악해 중요 산업을 통제하려는 시점에서 (TSMC 신설 공장은) 미국 국가 안보를 강화할 것"이라고 썼다. 이런 기류 탓에 미국의 제재가 파운드리를 넘어 메모리로 확산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중국 정부는 17일 자국 반도체 기업인 SMIC에 22억달러(약 2조7000억원)를 투자했다. 중국은 4~5년 전부터 신생 반도체 기업에 정부 돈을 펀드 형태로 수십 조원씩 넣고 있다. 이 덕분에 양쯔메모리(YMTC), 푸젠진화, 이노트론 등 신생 기업들은 50조~70조원을 기술 개발과 공장 설비에 쏟아부을 수 있었다.

일본도 반도체 부활을 노린다. 일본 경제 주간지 다이아몬드는 최근 "일본 경제산업성이 인텔과 TSMC 등의 생산·개발 거점을 유치하는 프로젝트를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국 업체에 독과점 압박 우려

메모리 반도체는 1970년대엔 미국 인텔과 TI가 장악하고 있었다. 1980년대 전자 기기 제조 강국으로 부상한 일본이 주도권을 가져왔다. 1990년 메모리 톱5는 NEC·도시바·히타치·후지쓰·미쓰비시였다. 1차 대전이다.

한 삼성전자의 전(前) 임원은 "일본에 패한 미국이 이 같은 일본의 독주를 견제하려고 90년대에 한국을 밀었다는 게 정설"이라고 했다. 2차 대전은 한국·미국·일본·독일·대만의 20여 기업이 각축한 2000년대다. 삼성전자가 주도한 치킨게임(상대방이 망할 때까지 초저가로 제품을 공급하는 전략)에 독일 키몬다, 일본 엘피다 등이 도산했고, 한국이 승리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는 중국 반도체 굴기(崛起·우뚝 섬)도 버거운데 미국·일본과 리턴 매치를 해야 할 판이다. 과거 메모리 1위였던 인텔은 작년 말 D램을 대체할 P램이라는 신개념 메모리 반도체를 내놨다. 국내 업계는 '미·중·일 정부가 정치적 의도로 '독과점' 카드를 내밀지 않을까' 우려하는 분위기다. 한국의 D램 점유율이 70%인데다 대부분 한국에서 만든다. 한 반도체 업체 관계자는 "한국 반도체를 자기편으로 하려고 '러브콜'을 보내던 미·중이 돌연 '적'(敵)으로 바뀔 위험성도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