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덕 웨스틴조선호텔서울 조리팀장

초짜 요리사 시절 일이다. 이탈리아인 주방장의 영어는 정말 알아듣기 어려웠다. 어느 날, 내 실수에 화가 난 주방장이 날 불러 주방 벽을 보고 서 있게 했다. 그런 날이 반복되니 부끄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아저씬 왜 맨날 벽 보고 서 있어요?" 지나가던 직원들이 묻곤 했다. 요리사 20여 명이 전쟁터 병사들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호텔 레스토랑 주방의 점심시간이 내겐 영원처럼 느껴졌다.

부끄럽다 못해 참담했던 내 청춘을 급반전시킨 구원의 존재가 있었다. 바로 라면이다. 자취생 때 나는 거의 매일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 라면 하나만은 자신 있었다. 혼이 쏙 빠질 만큼 유난히 바빴던 날 런치 타임이 끝나자, 다들 허기가 졌다. 선배 요리사가 라면을 꺼내왔다. 후다닥 일어나 내가 끓이겠다고 자청했다. '바보가 아니란 걸 보여주자!' 순간 가슴속에 전의(戰意)가 타올랐다.

다시마 국물을 내고 콩나물과 수프를 먼저 넣어 중불로 끓였다. 여기에 조개와 새우, 고추를 추가했다. 큰 집게로 저으며 면발을 '알 덴테(al dente·면이 살짝 덜 익어 단단한 상태)로 익혔다. 면만 따로 건져내 대접에 담고 조심스럽게 국물을 부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공들인 일이 또 있을까 싶을 만큼 집중했다.

그때다. 이탈리아인 주방장이 다가왔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라면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무슨 음식인지 물었다. 설명을 듣더니 자신도 먹어보겠다고 했다. 순간 영혼이 탈탈 털리는 기분이었다. '아메리카 갓 탤런트'에 나가 사이먼의 독설 심사평을 기다리는 마음과 비슷할까? 주방장이 내가 끓인 라면을 입에 넣은 뒤 눈을 감고 우물거리던 장면이 또렷하다.

이윽고 천천히 눈을 뜬 그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러곤 엄지를 척 올렸다. 나는 감전이라도 된 듯, 멍하니 그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그날 이후, 내가 주방에서 벽 보고 서 있는 일은 없었다. 오랜 면벽 수행의 산물이자 내 청춘의 구원이 된 요리, 라면은 내 인생 요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