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실과 국가경제위원회가 참여한 핵연료워킹그룹이 지난달 공동 작성한 '원자력 경쟁력 회복 보고서'를 통해 "붕괴 직전인 미국 원자력 산업의 전 분야를 정부가 적극 지원해야 하고, 특히 미국 수출입은행과 국제개발금융공사가 원전 수출에 자금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일본 원자력규제위원회는 지난 13일 롯카쇼무라 핵연료재처리 공장에 대한 안전 심사를 6년 만에 통과시켰다.

미국·일본의 이런 움직임은 최근 러시아·중국이 세계 원전 시장을 장악해가고 있는 현실을 방치해선 안 된다는 판단과 관련 있다. 미국은 1979년 스리마일 원전 사고 이후 2013년 보그틀 원전 두 기 착공까지 34년간 신규 원전 건설이 중단돼 원자력 산업 생태계가 무너진 상태다. 1950~1980년대 세계 원전의 절반을 도맡아 지었던 미국 웨스팅하우스는 2017년 파산보호 신청을 거쳐 2018년 캐나다의 자산운용사에 팔려나갔다. 일본도 후쿠시마 사고 이후 한동안 원전 폐쇄 정책을 밟으면서 경쟁력을 상실했다. 그 사이 중국·러시아가 국제 원전 건설 시장을 쥐고 흔들었다. 러시아 국영 로사톰은 세계 12국 36기 원전을 건설하고 있다. 로사톰은 원전 건설-운영-폐기까지 전 과정을 통제하는 BOO(Build Own Operate) 방식으로 개도국에 진출하고 있어 원전을 매개로 한 종속 관계를 구축해가고 있다. 중국도 파키스탄 원전 수출 성공에 이어 일대일로(一帶一路)의 하나로 개도국 원전 수출에 주력하고 있다.

원자력 기술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 신고리 5·6호기 같은 3세대 원전은 그 이전 2세대 기술보다 사고 확률을 10분의 1로 낮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근의 3+세대 원전은 전력 공급이 끊기더라도 냉각수 공급이 가능한 피동형(passive) 설비를 장착했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은 경수로의 고압(高壓) 폭발 위험 소지를 없앤 4세대 소듐냉각고속로(SFR) 기술을 개발 중이다. 그간 3700억원이 투입됐지만 탈원전 영향으로 내년부터는 연구 지속이 불확실하다. 원자력연구원에선 수소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4세대 초고온가스로도 연구 중이지만 탈원전으로 후속 연구 인력이 충원되지 않는다면 결실을 보기 어렵다. 두산중공업은 미국 기업과 4세대 원전인 소형모듈원전(SMR)을 공동 개발 중이지만, 내년 3월 신고리 5·6호기 설비 납품이 끝나면 원전 분야 사업장의 문을 사실상 닫아야 하는 위기로 몰리고 있다.

대기오염·온실가스를 줄이려면 석탄발전소를 줄여가야 한다. 그러나 전 세계 석탄발전소 5000기를 원자력 없이 태양광·풍력으로 대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기 혜택을 못 누리는 개도국 국민에게 냉장고 TV 컴퓨터를 보급하는 것은 인권 차원의 과제다. 선진국도 전기차 빅데이터 자율주행 사물인터넷 등 4차 산업으로 전력 수요가 급증할 것이다. 원자력 없이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과학기술에 조예가 없는 대통령 등 몇몇 인사가 자의적으로 원자력은 위험 기술이라고 단정짓고 기술 개발 기반의 뿌리부터 뽑아버리고 있다. 20~30년 뒤 중국·러시아 주도로 원자력이 주도적 에너지 기술로 자리 잡을 경우 그때 가서 국가 운명을 망친 데 대해 그들이 책임을 질 것인가. 기후 붕괴, 대기 오염 심각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탈원전을 외치고, 수소경제를 주장하면서 수소 대량생산이 가능한 원자력 기술을 외면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편견일 뿐이다. 정부는 최소한 신한울 3·4호기 건설 재개로 원자력 기술 생태계의 명맥을 유지시켜야 한다. 다음 정부에서라도 정책을 다시 검토해 원자력 산업의 재기(再起)를 꾀할 토대 정도는 남겨둬야 할 책임이 있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