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심리학

발터 슈미트 지음|문항심 옮김|반니 304쪽|1만5000원

2012년 7월 4일 스위스 방목 목장에서 소 떼가 산책 중인 할머니를 공격하는 사고가 벌어졌다. 할머니는 목줄을 맨 개 한 마리와 손주 둘을 데리고 초원에 난 산길을 걷는 중이었다. 소 떼는 왜 할머니 일행을 덮친 것일까. 새끼들을 데리고 있던 어미 소들이 할머니 일행이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것으로 여겨 위협을 느낀 탓이었다. 적절한 거리 두기는 인간 세계에도 해당한다. 사무실을 꾸밀 때, 기차나 영화관 좌석을 예매할 때, 강의실 자리에 앉을 때, 엘리베이터를 탈 때, 주차할 곳을 찾을 때 등 매 순간 타인 또는 사물과 어느 정도 간격을 둘지 우리는 심리적 시험대에 오른다. 독일 논픽션 작가인 저자는 진화심리학과 행동과학 연구를 바탕으로 너무 당연해서 평소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인간의 행동에 질문을 던진다. '사장님을 만나려면 왜 위로 올라가야 할까?' '창가 자리는 왜 인기가 많을까?' '강의실에서 왜 늘 같은 자리에 앉으려 할까?' 등이다. 상사(上司)와 부하(部下)라는 말은 실제로 일하는 사무 공간에도 해당하는 말이다. 회사 임원실은 대개 건물 상위층에 있다. 독일 기업 도이치포스트의 41층짜리 건물에서 대표가 쓰는 공간은 39층과 40층이다. 그 위엔 거실 형태의 임원 회의실과 공중 정원만 있다. 높은 위치에 있는 자가 물리적으로도 윗자리를 차지하는 일은 영장류에서도 나타난다. 지배자 격인 수컷 고릴라는 바위 위에 앉아 다른 수컷을 내려다보는 자세를 유지한다. 모두를 볼 수 있는 공간에 있어야만 상대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회사 임원실은 주로 높은 층 모서리에 있다. 햇빛이 잘 들고 전망이 좋은 자리이기에 미래의 전략을 구상하기도 좋다. 공간 배치와 사람 간의 거리는 인간 행동을 결정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고위 임원실은 높은 층에서도 주로 건물 모서리 공간을 차지한다. 창문이 두 방향으로 열린 곳이기 때문이다. 사각형 빌딩에서 모서리는 네 곳뿐이라는 희소성이 가치를 더 높여준다. 바깥 풍경이 많이 보일수록 고위급 자리다. "창문이 두 개인가, 세 개인가 하는 점은 그 사무실을 쓰는 사람이 '국장'이냐 '국장대우'이냐를 명확하게 나타내 준다."(202쪽) 카페나 도서관에서도 창가 자리는 늘 인기가 있다. 창밖 풍경을 바라보면 사물을 인식하는 범위가 높아진다. 창으로 들어오는 따스하고 온화한 빛은 격한 감정을 안정시키고 가라앉은 기분을 밝게 끌어올린다는 사실을 우리는 무의식에서도 알고 있다.

자리를 마음대로 선택하는 대학 강의실에는 '액션 존'이라는 곳이 있다. 앞쪽 가운데 자리를 선택하는 학생들이 뒤쪽이나 가장자리 학생들보다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하고, 성적도 평균 이상을 올린다. 강의실에서 처음에 앉은 자리는 이후에도 지속되는 경향이 있다. 이전 시간에 남이 앉은 자리에 앉는 일은 상대를 무시하는 행동으로 비칠 수도 있다.

콘서트나 영화관 등에서 인기 있는 자리는 저마다 다르다. 콘서트장에서는 무대 앞자리가 가장 인기 있는 자리다. 반면 영화를 예매할 때는 중간 열의 가운데 자리부터 사라진다. 세미나장, 강연장, 스탠딩 코미디 무대 등에선 앞줄이 항상 비어 있다. 강사나 배우가 앞줄에 앉은 관객을 무대 위로 불러 올리는 경우가 많아서일 수 있다.

인간은 영역을 수호하려 한다는 점에서 동물과 다를 바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함께 살기 위해 적절한 거리 두기는 필수적이다. 몸에서 45~50㎝인 밀접 영역, 50㎝에서 1.2m까지인 사적 영역, 1.2~3m 사이인 사회적 영역, 더 먼 거리인 3.5m 공간인 공적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사회적 영역에서부터는 상대의 동의가 필요하다. 사적 영역은 호감도를 가늠할 수 있는 거리이고, 친한 사이라도 밀접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면 싸움이 벌어질 수 있다.

‘코로나 시대’에만 거리 두기가 필요한 건 아니다. 서로의 공간을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 일에서 예의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