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땅!"

지난 7일 오후 4시 50분 충청북도 단양군 해발 300m 산자락에 펼쳐진 1500평 고추밭에서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남자 세 명이 타격봉(지주대를 박기 위해 고안된 파이프 모양의 망치)으로 알루미늄·무쇠 지주대를 밭이랑에 박아 넣는 소리였다.

지난 7일 오후 충북 단양군 영춘면 오사리의 한 고추밭에서 근로자들이 고추 지지대를 세우고 있다. 이들은 현대자동차 하도급업체 직원이다. 코로나 사태로 경영이 어려워진 회사가 순환 무급휴가에 들어가자 이달 초부터 고추밭에서 일하고 있다.

밭에서 일하던 이모(63)·박모(59)·이모(60)씨는 울산에 있는 현대자동차 하도급업체 직원들이다. 이들은 완성차를 부둣가로 이송하는 일을 했다. 그런데 지난달 회사가 전 직원을 대상으로 한 순환 무급휴가에 들어갔다. 직원 130명이 3개 조로 나뉘어 한 달에 10일씩 돌아가며 일하고 20일은 무급휴가를 가는 식이었다. 260만원이던 월급도 3분의 1 수준인 90만원 밑으로 떨어졌다. 코로나 사태로 완성차 수출이 급감해 회사로서도 어찌할 수 없어 내린 조치였다. 무급휴가 기간 중 다른 일거리를 찾아보려 해도 울산에선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예전 농촌에서 단기 일용직으로 일한 경험이 있는 직장 동료의 소개로 단양 고추밭까지 온 것이다.

이들은 매일 오전 7시부터 고추밭 이랑에 1~2m 길이의 지주대를 1m 간격으로 박는 일을 한다. 중간에 새참과 점심을 먹고 오후 5시까지 일한다. 셋 중 연장자인 이씨는 "생전 안 하던 일을 하니 팔뚝과 손이 온통 멍투성이"라고 말했다. 그의 목장갑은 해졌고 손바닥 곳곳에도 물집이 잡혀 있었다. 5일간 작업한 고추밭만 3만평. 이렇게 일해 박씨 등이 손에 쥐는 돈은 하루 10만원. 농장주가 일당 7만원에 교통비 1만원을 주고, 여기에 군청이 숙박비로 2만원을 준다. 숙소는 인근 모텔. 1박 4만원짜리 방 한 칸에서 셋이 잔다.

불황과 코로나 여파로 '생계 벼랑'에 몰린 사람들이 일거리를 찾아 농촌으로 향하고 있다. 무급 휴직에 들어간 중소기업 근로자, 식당 보조 일자리를 잃은 중년 여성들이 고추밭과 오이 재배 비닐하우스 등을 찾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코로나 사태로 입국이 막히며 일손 부족에 시달리던 농가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농촌 일자리 중개업체 '용컨설팅'의 이명우 대표는 "요즘 하루 30~50통씩 농촌 일자리를 알선해달라는 전화가 온다"며 "작년의 배에 해당하는 수치"라고 했다.

통계 수치로도 '이도향촌(離都向村·도시를 떠나 시골로 향함)'을 확인할 수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4월 제조업(2만3000명 감소), 도·소매업(16만9000명 감소), 숙박·음식점업(11만명 감소)에선 작년과 비교해 모두 취업자가 감소했으나, 농·임·어업 부문 취업자는 13만4000명이 늘었다.

이씨 등이 일하는 고추밭에는 도시에서 온 실직 식당 직원과 파출부 등 여성 일꾼들도 있다. 이들은 농장주 집에서 먹고 자며 밭을 갈고 고추를 심는 일을 하고 있다. 대구에서 온 A(57)씨는 일하던 식당이 '신천지 사태'로 문을 닫아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60대 여성 B씨도 비슷한 시기 일터이던 부산의 식당이 문을 닫았다. B씨는 "일당은 식당이나 여기나 5만~7만원으로 비슷하다"고 했다.

코로나 사태로 일거리가 완전히 끊긴 프리랜서들도 농가를 찾고 있다. 인도네시아어 전문 통역 관광 가이드 임병화(45)씨는 요즘 천안의 한 농장에서 오이 수확과 선별, 포장 작업을 하고 있다. 예년 이맘때는 한 달에 400만~600만원을 벌었다. 하지만 올해 2월부터는 '수입 제로(0)' 상태가 됐다. 3·4월엔 시에서 주는 월 50만원 지원금을 받으며 버텼지만, 이달 1일 농장으로 왔다. 한 달에 200만원을 받기로 하고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하는 조건으로 일하고 있다. 임씨는 "농촌 일은 처음이라 벌써 여러 군데 다쳤고, 몸도 고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