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전기를 총괄하는 곳은 서울이 아니고, 세종시도 아니고, 광주광역시 아래쪽에 있는 나주다. 전기에서는 그곳이 중앙이고, 그곳에 있는 전력거래소 내부에 중앙급전소가 존재한다. 그 방에 있는 전산 프로그램 하나가 우리나라 전기의 전 계통을 지휘한다.'

'88만원 세대'의 저자인 경제학자 우석훈(52)의 경고는 한국전력 본사가 있는 전남 나주에서 시작된다. 최근 출간한 소설 '당인리'는 나주에 대규모 지진이 발생해 중앙급전소가 붕괴해버리는 대정전 시나리오를 그렸다. 전기가 끊기자 통신이 단절되고 각 시도별 지자체는 중앙정부와 연락이 닿지 않아 고립된다. 대한민국 전체가 암흑으로 뒤덮인 순간, 청와대는 유일하게 전기가 들어오는 제주도로 탈출해버린다.

'한전에서 항의하지 않겠느냐'고 묻자 우석훈은 "사지 말라고 하겠죠. 위험한 책이니까"라며 웃었다.

12일 만난 우석훈은 "발전사 엔지니어들을 만나면 전국의 모든 전깃줄이 나주에 있는 컴퓨터 한 대에 물려 있는 것을 굉장히 불안해했다"면서 "'우리가 아무리 경고해도 반향이 없으니, 당신이 이 문제를 다뤄달라'고 부탁했다"고 했다.

소설은 전국 규모의 블랙아웃 직전까지 갔던 2011년 9·15 정전 사태에서 시작된다. 현장 공무원들이 지역별로 전력 공급을 차례대로 중단시켜 전국 규모의 정전은 막았지만 절차상의 문제로 징계를 받는다. 우석훈은 "비슷한 얘기를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로 고생하는 지역 보건소 직원한테 듣는다"고 했다. "'훈장 받으시겠다' 했더니 그러더라. 절차를 지킬 시간이 없어 일단 사람부터 입원시키는데 징계나 안 받았으면 좋겠다고."

소설에선 대정전 이후 지옥도가 펼쳐진다. 사람들이 엘리베이터에 갇히고, 차들은 도로에 묶인다. 병원에서도 비상 전력이 동나 시체들이 쌓인다. "화재도 엄청날 거다. 소화전이 나와야 불을 끄는데 물통을 들고 다닐 순 없지 않나."

평범한 일선 공무원들이 영웅으로 활약한다. 한국전력의 자회사인 중부발전, 그중에서도 한직으로 밀려난 직원들이 서울 마포구 당인리 발전소에 모여 송전 라인을 복구한다. 책임 떠넘기기 바쁜 중앙 부처와 징계를 무릅쓰고 당인리에 모여 전기를 복구하려는 직원들이 대립한다. 그는 "실제로는 폼은 중앙에서 다 잡고, 지겹고 힘든 일은 지역 현장에서 도맡을 때가 많다"고 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소설 '페스트'가 유행하듯, 언젠가 이 소설을 다시 펼쳐드는 날이 올지 모른다. 현대환경연구원·에너지관리공단에서 근무하며 에너지 분야에 오랫동안 몸담은 그는 "정전 후에 기다리면 전기가 돌아온다고들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은 날이 올 수 있다"면서 "발생 확률이 높은 재난임에도 불구하고 전기가 공기처럼 당연해지면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있다"고 했다.

한국전력의 블랙아웃 매뉴얼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우석훈은 "매뉴얼 자체가 불량품이라 매뉴얼대로 하면 블랙아웃 이후의 복구 과정인 '블랙 스타트'가 이뤄질 수 없다"고 했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인용해서 한 줄 한 줄 설명하고 싶은데 기밀 자료라 살짝 바꿔 썼다."

위험을 대비해 지역별로 전력망을 분산한 유럽이나 일본과 달리 중앙에서 모든 전기를 통제하는 한국의 시스템을 비판했다. "많은 분야에서 지방으로 분산이 이뤄졌는데 전기·에너지는 바뀌질 않았다. 게다가 자꾸 한전 사장으로 대통령 친구들이 오지 않나. 밑에서부터 성실하게 일해온 실무자들이 변화를 꿈꾸기 어려운 구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