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윤 음식전문기자

서울의 유명 태국 음식점에서 개발한 쌀국수 밀키트(meal kit)를 온라인 구매했다. 밀키트는 손질한 음식 재료가 양념, 레시피(요리법)와 함께 들어 있는 간편식의 일종. 비닐 포장을 뜯으니 마른 쌀국수와 냉동 국물, 마늘을 잘게 다지고 볶아서 건조시킨 플레이크가 들어 있었다. 냄비 두 개를 꺼내 하나에는 쌀국수를 삶고, 나머지 하나에는 냉동된 국물을 녹이고 끓였다. 그릇에 국물을 푸고 국수를 말아 마늘 플레이크를 뿌렸다. 모양새가 그럴듯했다. 맛도 괜찮았다. 국물이나 면발이 그 식당에서 사 먹었을 때와 별 차이 없었다. 가격은 2000원 더 쌌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이 정도 맛을 즐길 수 있다면, 코로나 사태가 끝나더라도 이 식당에 찾아갈 필요가 있을까?'

간편식과 배달음식 시장이 코로나 사태 이후 폭발적으로 커졌다. 간편식과 배달음식은 코로나 이전부터 성장세였다. 식사 준비 시간과 노력을 덜어주는 간편함과 외식보다 비용이 적게 드는 경제성, 레스토랑 메뉴를 집에서도 즐길 수 있는 다양성으로 소비자를 사로잡았다. 코로나 이후 손님이 급감하면서 식당마다 생존을 위해 더욱 다양한 간편식과 배달음식을 내놓고 있다. 식당에서 먹을 때와 버금가는 맛을 내기 위한 기술도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 음식 먹기만을 위해서라면 더는 식당을 방문할 필요가 없어질 때가 가까워지고 있다.

찾아가 먹고 싶으냐 아니냐는 오래전부터 식당의 수준을 판가름하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프랑스에서 시작해 세계 미식의 기준을 확립한 미쉐린 가이드는 식당을 별 3개로 구분하는 '스타 시스템'으로 유명하다. 별 1개는 '요리가 훌륭한 식당', 별 2개는 '요리가 훌륭하여 찾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레스토랑', 별 3개는 '요리가 매우 훌륭하여 특별히 여행을 떠날 가치가 있는 레스토랑'이다. 그러니까 최고의 레스토랑은 그곳의 음식을 맛보는 것을 목표로 일부러 찾아가고 싶은 식당이란 거다.

사실 미쉐린 2스타 이상이면 음식은 큰 차이 없다. 별 3개를 따내려 애쓰는 요리사가 있는 별 2개 식당이 오히려 나을 때도 있다. 그렇다면 별 2개와 3개를 가르는 차이는 뭘까. 바로 '경험'이다. 서양에서는 고급 음식점에서 음식 먹는 행위를 '다이닝 익스피리언스(dining experience)', 즉 식사·외식 경험이라고 부른다. 단순히 허기를 채우거나 음식 맛보기를 넘어 하나의 경험이 돼야 한다는 의미다.

세계 정상급 음식점들은 손님이 찾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인다. 스페인을 넘어 세계 최고 레스토랑으로 자타가 인정하는 '엘 세예르 데 칸로카(El Celler de Can Roca)'를 2년 전 방문했다. 장장 3시간에 걸친 만찬 코스의 마무리로 디저트가 나올 차례였다. 종업원이 '종이'가 담긴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놨다. 오래된 책에서 찢어낸 것 같은 종이 여러 장이 종잇장처럼 얇은 과자 사이사이 끼워져 있었다. 종업원은 투명한 유리병에 담긴 정체불명의 액체를 종이에 똑똑 떨어뜨렸다. "이 디저트의 이름은 '오래된 책(Old Book)'입니다. 맛있게 즐기십시오."

얇은 과자부터 집어 깨물어봤다. 향긋한 레몬향과 고소하고 달콤한 맛이 났다. 프랑스 과자 마들렌의 전형적인 맛과 향이었다. 이번엔 종이를 입에 넣었다. 놀랍게도 오래된 책 냄새가 코로 올라왔다. 둘이 합쳐지면서 오래된 책을 펼쳐 넘길 때 누렇게 바랜 종이가 손끝에서 바스락거리는 느낌이 연상됐다. 진짜로 책을 씹어 먹는 기분이었다.

다시 등장한 종업원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희 셰프가 '책을 먹으면 어떤 맛일까' 궁금해하다 창조한 디저트입니다." 종이처럼 보인 건 쌀로 만든 식용 종이. 여기에 식용 잉크로 인쇄했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 즉 작가가 마들렌을 홍차에 찍어 먹자 유년기로 되돌아가는 부분을 인쇄했다. 투명 액체는 100년 전 출간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책의 실제 속지에서 향을 추출한 에센스다.

"다이닝(dining)이란 음식에 대한 '기억'이며, 우리는 손님들의 '감각'을 고양하기 위한 요리를 창조한다"는 이 레스토랑 주인, 로카(Roca) 삼형제의 철학을 체험하게 해준 디저트였다. 영원히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최고의 식당은 음식이 아니라 경험을 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