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오전 10시. 충남 천안에 있는 삼성SDI 사업장에 낯선 손님들이 찾아왔다. 현대차그룹을 이끌고 있는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현대·기아차 연구개발본부 알버트 비어만 사장, 상품담당 서보신 사장 등과 함께 방문한 것이다. 이들을 맞은 사람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한 전영현 삼성SDI 사장, 황성우 삼성종합기술원 사장 등 삼성의 최고경영진. 이들은 차세대 전기차용 배터리인 전고체(全固體) 배터리 개발 현황과 방향성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 뒤, 오찬을 함께 했다.

정 부회장이 삼성 사업장을 공식적으로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재계에서는 “한국 경제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경쟁하고 갈등했던 국내 1·2위 기업인 삼성·현대차가 과거를 뒤로 하고 더 큰 도약을 위해 협력하겠다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국내·외 급변하는 경제상황에서 코로나 위기까지 겹쳐 그 어느때보다 힘든 상황이기 때문에 지금의 기회를 잃으면 재앙이 될 것이라는 CEO(최고경영진)의 절박한 심정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국내 양대 그룹 총수인 삼성그룹 이재용 부회장과 현대차그룹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13일 천안 삼성SDI 공장에서 차세대 전기차용 배터리인 전고체 배터리 개발 현황과 방향성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사진은 이재용 부회장(왼쪽)과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지난해 1월 2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 그랜드홀에서 열린 2019 기해년 신년회에서 악수하는 모습.

◇삼성·현대가 주목하는 미래 전기차 배터리

이재용·정의선 회동의 주인공인 전고체 배터리는 ‘꿈의 배터리’라 불리는 차세대 전지다. 이 배터리는 리튬이온 배터리 내부 액체 전해질을 고체로 바꾼 것이다. 기존 배터리는 과도한 열이나 충격을 받으면 액체 전해질이 흘러내려 폭발하는데, 전고체 배터리는 내부에 인화성 액체가 없어 폭발하지 않는다. 전고체 배터리는 내부에 분리막도 없어 크기도 기존 배터리의 절반 수준으로 줄일 수 있고, 얇게 만들어 구부릴 수도 있다. 이론적으로 전기차에 전고체전지를 장착하면 1회 충전으로 700㎞ 이상 주행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현재 배터리 업체들뿐 아니라 일본의 도요타·파나소닉, 한국의 현대차 등 완성차 업체들도 개발을 집중하는 분야다. 조재필 울산과학기술원(UNIST) 교수는 “이르면 5년 후 전고체 배터리가 전기차에 상용화될 수 있다”며 “전고체 배터리가 탑재될 경우 전기차는 가격 하락, 주행거리 증가 등으로 ‘빅뱅’을 맞이할 수 있다”고 했다.

지난 3월 삼성 종합기술원은 리튬 금속을 사용할 경우 전고체 배터리 수명을 좌우하는 ‘난제’를 해결했다. 업계에서는 정의선 현대차 수석부회장이 삼성이 해결한 전고체 배터리 관련 기술을 살펴보려 삼성SDI를 찾은 것으로 본다. 한 업계 관계자는 “현대차의 전고체 배터리 기술도 상당한 수준”이라며 “현대차가 삼성과의 본격적인 비즈니스에 앞서 삼성의 기술력을 살펴보려는 일종의 탐색전으로 본다”고 했다.

◇경쟁·갈등의 삼성과 현대, 도전과 협력으로

이날 이재용·정의선 회동은 삼성·현대 기업사에서는 ‘일대 사건’이다. 대한민국 산업 발전을 이끌었던 삼성과 현대차는 ‘영원한 라이벌’로 불렸다. 사업영역이 크게 중복되진 않았지만 이병철 삼성 창업주와 정주영 현대차 창업주 때부터 늘 팽팽한 경쟁관계였다. 1995년 삼성자동차 출범으로 삼성이 승용차 사업에 진출하면서, 삼성과 현대차의 갈등관계는 최고조에 달했다. 이후 삼성이 자동차산업을 르노에 매각한 뒤에도 긴장관계는 계속 이어졌다. 현대차가 전기차 배터리를 LG화학, SK이노베이션에서만 공급받고, 삼성SDI는 철저히 배제한 배경에는 이 같은 ‘과거’가 적지 않게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2012년 이 부회장이 유명 자동차회사인 피아트-크라이슬러의 지주회사인 엑소르 사외이사에 위촉되고, 삼성전자가 미국 최대 전장회사인 하만을 인수하고 자율주행차 조직 등을 신설할 때마다 현대차에서는 크게 긴장했다. 2014년 한국전력 삼성동 부지 입찰전에서 두 회사는 또다시 격돌했고, 현대차는 감정가의 배 이상 금액을 써내고 겨우 입찰받았다.

그러나 최근 삼성은 이 부회장, 현대차는 정 부회장 체제가 굳어지면서 새로운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한 자동차업계 고위 관계자는 “과거 양적 성장 시대엔 국내 라이벌 견제가 매우 중요했지만, 국경과 업종을 넘어선 글로벌 무한 경쟁시대에서는 국내의 경쟁구도는 무의미해졌다는 인식을 3세 경영인들은 갖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두 사람은 정 부회장이 이 부회장을 ‘형’이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운 사이다. 이 부회장은 주변 지인들에게 “정 부회장은 훌륭한 경영자이자 멋진 남자”라고 평가했고, 정 부회장은 이 부회장이 수감생활을 할 때 면회를 가기도 했다.

◇“코로나 경제위기 ‘코리안 어벤저스’로 극복”

특히 배터리·자율주행 등 미래 자동차 기술은 어느 한곳이 독자 개발하기 힘든 복잡한 기술로, 협업이 필수적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2018년 10월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 도요타자동차와 소프트뱅크는 이동(移動)서비스 사업에서 업무제휴를 한다고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도요타 아키오 사장과 손정의 회장은 “미래자동차는 ‘반도체 덩어리’가 되며 모빌리티 사회는 AI(인공지능)가 이끌 것”이라며 자동차기업 도요타와 IT 기업인 소프트뱅크가 협업하는 배경을 밝혔다. 일본은 전고체 배터리 기술도 도요타를 중심으로 한 완성차업체와 배터리·화학 업체, 그리고 정부가 4자 연합이 돼 연구하고 있다.

한국은 쟁쟁한 관련 글로벌 기업들이 두루 있는 만큼, 미래 먹거리를 위해 서로 손 잡고 시너지를 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계속 있어왔다. 고태봉 하이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2025년까지 친환경차만 44종을 출시하고, 2028년엔 전기로 가는 ‘도심 항공기’ 사업을 하겠다는 계획을 가진 현대차 입장에서는 전고체 배터리 기술 확보가 시급하다”며 “양대 기업 총수의 회동은 ‘코리안 어벤저스’ 출범 가능성을 높였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재계에서도 “이재용·정의선의 협력이 코로나 이후 대한민국의 새로운 미래를 만드는 희망이 되길 바란다”며 “정부와 정치권도 기업들이 함께 위기극복을 할 수 있도록 발목잡기가 아니라 힘실어주기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