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지난 7일 국민성금이 피해자 할머니를 위해 쓰인 적이 없다며 자신의 수요집회 참가 중단 의사를 밝히는 기자회견을 한 이후 치매 노인 취급을 당하고 있습니다.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현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을 지낸 윤미향 더불어시민당 당선인은 이 할머니의 지적이 나온 직후 소셜미디어에 “한일 합의로 박근혜 정부가 받은 10억엔에 대해 오늘 오전 이 할머니와 통화하는 중 할머니의 기억이 달라져 있음을 알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우희종 시민당 대표도 다음날 라디오에 출연해 “할머니 주변에 계신 최 모씨라는 분에 의해 기억이 왜곡된 것 같다”고 했습니다. 한경희 정의연 사무총장은 “할머니께서 나이가 많으시고, 코로나19 이후 심신이 취약해지신 상태” “서운한 것도 있고 오해도 있고 기억이 왜곡되는 것도 있었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용수 할머니의 기억을 문제 삼는 대응 논리는 그간 일본 극우 세력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피해 증언을 부정해온 방식이어서 놀랍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와 관련해 일본 극우 세력이 위안부 피해를 부정하는 근거는 “강제연행을 입증할 증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문서 기록이 아닌 피해자 할머니들의 기억을 토대로 한 증언을 위안부 강제동원 증거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기억은 부정확하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조선일보 DB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합니다. 승자는 자신에게 불리한 역사를 지우거나 은닉하고, 과거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가공해 공식 기록으로 남깁니다. 반면, 패자에게 남는 것은 자신의 기억뿐입니다. 역사학자 임지현 교수(서강대 사학과)는 저서 '기억 전쟁'에서 역사를 오직 문서 기록에 의거해 입증하는 실증주의에 의문을 표합니다. 승자와 패자가 겨루는 기억의 전쟁터에서 유리한 쪽은 언제나 기록을 갖고 있는 역사의 승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기억전쟁 35쪽) 위안부 피해 증언과 관련해 위안부 할머니들의 세부 기억이 바뀐 것은 사실입니다. 일본 우익세력은 이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위안부 할머니들의 기억과 증언의 진실성을 부인해 왔습니다. 이에 맞서 정대협과 정대협을 이어받은 단체인 정의연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기억을 '성역'이자 '진실'로 떠받들어 왔습니다.

역사의 공식기록은 가해자 편이며, 피해자는 기억과 증언을 통해 가해자의 역사에 대항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토록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기억을 받들던 이들이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 이후 달라졌습니다. 이 할머니의 문제 제기가 자신들을 겨누자 할머니 기억력을 공격하며 치매 노인 취급 했습니다. 이런 대응은 위안부 피해를 정부 차원에서 인정하고 사죄한 일본의 공식 입장에 비판적이었던 일본 내 혐한·극우 세력이 쾌재를 부를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억전쟁 249쪽) 일본은 고노 담화(1993)를 통해 위안부의 강압적인 모집과 일본 정부의 직·간접적인 개입을 처음으로 인정했습니다. 이어 무라야마 담화(1995)에서도 식민 지배로 인한 가해 사실을 인정하고 거듭 사과했습니다. 고노 담화가 위안부 피해 사실을 인정한 근거가 바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이었습니다. 비록 문서 기록은 없지만 피해자가 엄존하고 그들이 자신이 당한 고통을 기억하고 있으므로 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본 극우 세력이 문제 삼는 기억 대상과 정의연측에서 문제 삼은 기억의 대상은 물론 다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을 부인하기 위해 이 할머니의 기억이 부정확하다고 공격한 행위는 정의연이 존재 근거를 스스로 허문다는 점에서 자살행위나 다름없습니다. 그런 딜레마를 깨달은 걸까요. 정의연은 지난 11일 기자간담회에서 태도를 바꿔 이용수 할머니에게 “원치 않는 마음의 상처를 드려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마음의 상처를 준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할머니 마음을 다독이기 위해 급하게 무마하려 한 인상이 짙습니다. 이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되든 그간 할머니들의 기억을 무기 삼아 싸워온 정의연의 투쟁방식이 더는 유효할 것 같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