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표 서원대 교수

올여름 서울 성북구 정릉의 북한산 초입 주택가에 '최만린 미술관'이 문을 연다. 이곳은 원래 조각가 최만린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의 자택이었다. 그는 30년 동안 여기 살면서 창작을 했다. 최 전 관장이 자신의 조각과 자료 126점을 성북구에 기증하고 성북구가 집을 매입해 개조하면서 멋진 미술관이 태어나게 됐다. 얼마 전 이곳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마당의 감나무와 단풍나무가 그의 추상 조각과 참 잘 어울렸다. 오래된 문고리도 운치가 있었다.

최 전 관장의 작품을 볼 때마다 '저 추상은 어디에서 왔을까' 하는 궁금증을 갖게 된다. 추상이 그냥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구상과의 치열한 투쟁 끝에, 버릴 것은 버리고 최후에 남는 것이 추상이지 않을까.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거기엔 수많은 삶과 목소리가 담겨 있을 것이다. 유치환 시인의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란 시구처럼 말이다.

최 전 관장은 젊은 시절 한때 아나운서였다. 프로 조각가로 발을 내딛던 청춘의 시기에, 생계를 위해 3년 동안 아나운서 생활을 했다. 그때 방송국에서 아내(성우 김소원씨)를 만났다. 방송계에서는 아직도 그를 '최만린 아나운서'로 부른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 최만린 초대전 개막식 때, 하객 가운데 유명 아나운서도 많이 보였다. 그는 서울 정동에 '첫 방송터 유허비'를 세우기도 했다.

3년 전 이곳을 찾았을 때, 벽에 걸려 있던 사진 한 장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최 전 관장 부부와 탤런트 최불암씨 부부가 연극 공연장에서 찍은 것 같았다. 그와 최불암씨는 동서 사이다. 연극이 끝난 뒤의 희열감이 사진에 가득했다. 이런 사진 한두 장이 미술관 한쪽에 걸렸으면 좋겠다. 어찌 보면 사사로운 것이지만 조각가 최만린을 좀 더 풍요롭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주홍빛 감이 주렁주렁 열리는 가을 어느 날, 최만린 조각을 좋아하는 아나운서와 성우들이 시 낭송회를 열면 어떨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