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려면 당신 몫 4분의 1만 기부해. 어디 어울리지도 않게 상류층 행세야?"

서울 서초동에 사는 정모(40)씨는 긴급재난지원금 온라인 신청이 시작된 11일, 남편이 재난지원금을 기부하려 한다는 소리를 듣고 부부싸움을 벌였다. 가구주인 남편이 "둘 다 월급 꼬박꼬박 나오고 먹고살기 어렵진 않잖으냐"면서 기부하는 게 좋겠다고 했지만, 정씨 생각은 달랐다. 정씨는 "남편 회사에 은근한 기부 분위기가 있는 모양"이라며 "하지만 앞으로 내야 할 세금이 얼마 더 늘어날지도 모르고, 이번에 다 줄 때 받아서 애들 책도 사고 소상공인 매출을 올려주는 게 취지에 맞는다고 생각한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정씨 부부는 남편이 정 원한다면 4인 가족 앞으로 나오는 지원금 100만원 중 본인 몫으로 25만원만 기부하는 데서 타협점을 찾았다.

긴급재난지원금이 부부싸움 요인으로 떠올랐다. 받느냐 기부하느냐를 놓고 의견 일치를 본 가정도 많지만, 뜻밖에 부부간 생각이 다른 경우도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는 18일 시작하는 오프라인 신청 때는 가구주 아닌 식구도 신청이 가능하지만, 11일부터 이번 주 안에 받는 카드사 온라인 신청은 가구주만 신청할 수 있어 더욱 부부간 갈등 요인이 되고 있다.

은행원 이모(44·서울 목동)씨는 아내에게 "행여라도 가구주라고 갑질 할 생각하지 말라"는 소리까지 들었다고 했다. 이씨는 "기부하기보다 지역 소상공인들을 위해 소비하는 게 본래 긴급재난지원금 취지에 맞지 않느냐고 와이프가 조목조목 따지는 통에 가정의 평화를 위해 재난지원금을 받기로 했다"며 "회사에선 받았는지 기부했는지 굳이 말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전했다.

이런 다툼은 중년 부부라고 예외는 아니다. 무조건 여자들만 받자는 생각인 것만도 아니다. 윤모(63·서울 종로구)씨 부부는 남편이 기부 반대, 아내인 윤씨가 기부 찬성이어서 의견 충돌을 빚었다. 윤씨가 가구주인 남편을 대신해 카드사 홈페이지에서 긴급재난지원금 신청 버튼을 누르다 실수로 '기부하기'를 눌렀고, 이를 알게 된 남편이 노발대발하며 당장 기부를 취소하라고 한 것이다. 윤씨는 "기왕 이렇게 된 거 기부하자. 어차피 하위 70%만 지급했다면 못 받을 돈 아니었냐고 했다가 다툼만 커졌다"면서 "그 돈 없다고 못 사는 것도 아닌데, 남편이 이렇게 옹졸한 사람인 줄 몰랐다"고 했다.

기부 안하려면 '0' 입력, 하려면 전액기부 체크 - 한 카드사의 긴급재난지원금 신청 화면. 기부를 원하지 않으면 ‘0’을 입력해야 하고, ‘전액 기부’ 버튼을 한 번 체크하면 곧바로 기부로 이어지게 돼 있다. 인터넷 금융거래 시 ‘동의’ 버튼을 누르는 데 익숙해진 사용자들이 무심결에 ‘기부’ 버튼을 누르면서 원치 않게 재난지원금을 기부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한편 카드업계에 따르면, 지난 11일 카드사 8곳(비씨 제외)이 신청 접수한 긴급재난지원금 1조1111억원 중 기부액은 76억원으로 0.7%를 차지했다. 기부금이 가장 많은 곳은 하나카드로 17억원이었고, 우리(16억원)·KB국민(15억원)·NH농협(11억원) 등 순이었다. 지원금 신청액이 가장 많은 카드사는 업계 1위(사용액 기준) 신한카드로 2556억원이었고, KB국민(2179억원)·NH농협(1538억원)·삼성(1435억원)·우리(1141억원) 등이었다. 이에 따른 지원금 신청액 대비 기부금 비율은 하나(2.6%), 우리(1.4%), KB국민·NH농협(이상 0.7%) 순이었다. 삼성(0.5%), 롯데(0.4%), 신한·현대(이상 0.2%)는 평균보다 기부율이 낮았다.

각 카드사는 당일 신청분에 한해 기부 취소나 금액 수정을 허용하고 있다. 카드사가 행정안전부에 신청 자료를 넘기는 11시 30분 전까지 홈페이지·모바일앱을 통해 수정하면 된다. 신한·삼성·현대카드는 콜센터나 점포를 통해야 한다. 정부는 전액 기부에 동의한 경우 정말 기부할 것인지 재차 묻는 팝업창이 뜨도록 시스템 수정을 카드사에 요청한 상태다. 현 신청 절차에선 재난지원금과 기부 신청 항목이 한 페이지에 있어 습관적으로 '동의'를 누르던 이들이 실수로 전액을 기부했다는 민원이 많았기 때문이다. "실수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는 당초 카드업계 우려에도 "재난지원금 신청과 기부 신청 항목이 한 페이지에 오도록 하라"는 가이드라인을 고집한 게 행정안전부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정부가 기부 실수를 의도적으로 유도한 것"이라는 비판도 커졌다.

행정안전부는 이날 설명 자료를 내고 "추후 팝업창으로 기부 여부를 재차 확인하고 당일 기부 내용을 수정하지 못한 경우 주민센터 등에서 추후 수정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