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완 모스크바 특파원

코로나 사태로 이동 제한 조치와 강제 유급 휴가가 지속되고 있는 러시아에서 최근 연예 가십 하나가 소셜미디어를 뜨겁게 달궜다. 러시아 배우이자 톱스타인 파벨 프리루치니(33)가 아내에게 손찌검했다는 뉴스였다. 아내는 직접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린 영상에서 울며 "남편이 지난 열흘 동안 술에 빠져 지냈다"며 "그가 나에게 손을 댔다. 그를 막을 수가 없다"고 호소했다.

많은 러시아 언론은 이 사건을 단순한 가정 폭력 이상으로 다뤘다. 코로나로 인한 강제 휴가와 자가 격리가 가정 내 음주를 증가시켰고, 러시아인의 악명 높은 폭음(暴飮)과 술주정 습관까지 다시 불러일으킨다는 해석이 나왔다. 그간 러시아 정부는 강력한 금주 정책을 추진해 왔는데, 코로나 때문에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 있다는 우려였다.

러시아의 '자가 격리 음주' 현상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닐슨 자료에 따르면 러시아의 4월 첫째 주 보드카 총소비량은 작년 같은 기간보다 34% 증가했다. 그 전주엔 31% 증가했다. 러시아는 3월 말부터 직장 대부분이 유급 휴가에 들어갔으며 모스크바를 비롯한 전역에 외출 금지령이 내렸다. 동시에 맥주나 위스키 소비량도 급증했다. 전문가들은 자가 격리 상태에서 여러 걱정, 번민과 무료함 등이 알코올 소비 증가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지난 20년간 러시아에선 강력한 금주 정책을 시행해 왔다. 2000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취임 이후, 정부는 1990년대 '보드카에 찌든 러시아인'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주류에 높은 세금을 매기고 술 광고를 제한했다. 선진국에 비해 낮았던 평균 기대 수명(2000년 남성 기준 59세)을 늘리기 위한 국민 건강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정책은 효과를 봤다. 2003년 1인당 20L가 넘었던 알코올 소비량이 2016년엔 절반 수준(11.7L)이 됐다. 남녀 기대 수명은 2012년 70세를 넘겼다. 현재 러시아는 평균적으로 독일, 프랑스보다 술을 덜 마신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가 이런 흐름을 반전시켰다.

'보드카는 병을 낫게 해 준다'는 전통적 미신도 최근 알코올 소비에 일조했다. 하지만 과학적으로는 근거가 없다. 러시아 보건 당국도 "음주는 (미신과 반대로) 코로나 감염 위험을 키운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상당수 러시아인은 보드카와 관련해선 과학을 거부한다. 요즘 유튜브엔 "코로나를 이겨 보겠다"며 보드카를 자랑스럽게 '원샷'하는 동영상이 올라온다〈사진〉. 소련 시절 집단농장 감독관 출신인 이웃 나라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도 공공연하게 "보드카와 사우나가 코로나 치료제"라고 주장한다.

집에 갇힌 상태에서 술을 많이 마시다 보니 프리루치니 사례 같은 가정 폭력도 늘어났다. 최근 모스크바에선 코로나 때문에 집에서 휴가를 보내던 남성이 만취 상태에서 임신한 아내를 때려 응급실에 보내는 일이 발생했다. 외출 금지령 이후 가정 폭력 신고가 15~25% 정도 늘어났다고 한다. 40대 여성 나탈리아씨는 "코로나 때문에 가장의 수입이 줄거나 실직한 경우, 술 때문에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라고 했다.

심각성을 인식한 각 지자체는 급히 주류 판매를 제한하고 있다. 러시아 북부 카렐리야 지역은 주류 판매 가능 시간을 하루 네 시간(오전 10시~오후 2시)으로 줄였다. 야쿠티아 지역에선 외출 금지령 첫 일주일간 주류 판매를 전면 금지했다. 하지만 코로나가 깨운 러시아의 '음주 본능'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전망이다. 보드카란 유령이 지금 러시아를 떠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