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가 보이지 않고 세상이 막막하다며 젊은이들이 호소합니다. '꼰대'나 '라떼'를 넘어서서, 진정으로 가슴을 열고 그들을 이해하며 멘토가 돼줄 인생 선배들의 조언을 연재합니다. 첫 회는 '한국 연극의 대모(代母)'라 불리는 배우 박정자(78)씨입니다.

힘들지? 난 내 손주들 세대에는 힘든 일이란 없을 줄 알았는데 아니더구나. 이 할미가 지금껏 거친 세상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좀 들어볼래? 꼭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되는 자랑 섞인 훈계로 들어주진 않았으면 좋겠어.

중학교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너희를 난 더 이상 어리다고 생각하지 않아. 아홉 살 때 난 제주도와 강화도에 피란을 다니며 학교 네 군데를 다녔으니까. 머리 위엔 B-29가 마구 날아다녔지. 그런 세상을 온몸으로 견뎌내야 했어.

'헬조선'이란 말이 들리더구나. 젊은이들이 살기에 이 나라가 지옥 같단 얘기겠지? 이렇게 생각해 보자꾸나. 이 세상 지옥도 천국도 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거야. 몇 년 전에 공연을 전공하는 대학생들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어. 한 학생이 '선생님께 어떻게 오늘 같은 시간이 있을 수 있었느냐'고 물었지. 난 이렇게 답했어. "간단하다. 나는 나 혼자서 살아남았다. 그러니 여러분도 살아남아라."

모든 시간에 내가 최선을 다했고, 많이 참았고, 끈기를 지니며 견뎠다. 곰처럼 미련하게. 하지만 인간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이 그러지 않고 약아빠지면 오히려 자기 발등을 찍을 수도 있다. 그러고 나니 보상이 주어지더라. 여러분도 버텨라….

1962년부터 매년 연극 무대에 선 배우 박정자는 “지금껏 우직하게 살아오며 세월을 견뎠다”고 했다.

난 대학 2학년 때였던 1962년에 첫 오디션을 보고 '페드라'의 시녀 역으로 처음 연극 무대에 섰어. 하지만 오래도록 주역에선 밀려나 있었지. 내가 너무 개성이 강하다는 거야. 1986년에 극단 산울림에서 '위기의 여자'를 했어. 처음엔 연출 임영웅 선생조차 나를 염두에 두지 않았지. 나한테 주인공 맡을 배우 좀 추천해 달라기에 이렇게 또박또박 말했어. "위기의 여자, 박정자는 안 되나요?" 돌이켜보면, 나는 나 자신을 스스로 '역(逆)제안'하는 방법으로 내 위기를 극복했던 거야.

'위기의 여자'는 6개월 동안 250회 공연하는 기록을 세웠고, 소극장은 매일 주부 관객으로 넘쳤어. 그 연극은 한국 연극사의 분기점이었을 뿐 아니라 배우 박정자를 다시 태어나게 한 작품이었지. 온갖 상이란 상은 다 쏟아졌고 국가대표 배우란 얘기까지 들었어.

곰곰 생각해 보니 내가 우직하게 살지 않았더라면 그 기회를 잡을 수 없었어. 난 '나는 왜 안 되느냐'고 자책하지 않았어. 내가 했던 게 '노오력'이었다고? 노력은 무슨, 그냥 좌충우돌한 거지. 나는 버텼고, 내가 버틸 수 있게끔 해 줬던 사람들에 대해 감사하며 그 시간을 보냈어. '내가 갈 길은 이 길밖에는 없다'고 여기고, 아주 어려운 시어머니 밑에서 시집살이를 한다고 생각하며 연극이란 가시밭길을 걸었던 거야.

힘든 적 있었느냐고? 많았지. '에쿠우스'나 '그 여자 억척어멈'을 할 때는 '난 역부족인가 봐…'라며 절망했지. 거울을 보면서 "박정자 너 이것밖에 못하니?"라며 호통을 치기도 했어. 왜 그랬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어. 너무나 열연만 하면 좋은 건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야. 한두 발짝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하는 건데 그러지 못했던 거야.

내 대표작? '19 그리고 80'이지. 열아홉 살 청년과 여든 살 할머니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할머니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면서도 세상을 사랑으로 바라보고, 사랑이란 아낌없이 주는 거라고 말해. 처음엔 한 회만 하고 그만둘 줄 알았는데 내년에 진짜 80세가 될 때까지 하게 됐지 뭐야. 얼마 전에 내 연극 인생을 다룬 모노드라마를 했는데, 거기 이런 대사가 있어. "79세가 되면 두 가지 선택이 있다. 죽든가, 여든 살이 되든가." 80세가 뭐 대수라고.

계획이 있느냐고 내게 누가 묻더군.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계속 하면 성공이라고 답했지. 돌이켜보면, 참 고맙게도 세상에 박정자라는 이름 세 글자를 내놓을 수 있었어. 그럼 죽기 전에 이름값을 해야잖아. 그게 바로 계획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