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책

실비 제르맹 지음|김화영 옮김|문학동네 504쪽|1만5800원

1870년 보불전쟁부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에 이르기까지 세대별로 전쟁에 동원된 한 가족의 역사를 환상적 상상력으로 묘사한 장편소설이다. 프랑스 페미나 문학상과 고교생이 뽑는 공쿠르 문학상을 잇달아 수상한 소설가 실비 제르맹(66)이 1985년 발표한 데뷔작이다. 그녀의 작품 중 ‘분노의 날들’을 비롯한 4권이 2006년 이후 우리말로 옮겨진 뒤 이제서야 첫 소설이 김화영 고려대 불문과 명예교수에 의해 번역됐다. 김 교수는 “오랫동안 번역을 하느라 애를 먹었다”며 “앞으로 노벨문학상이 프랑스 문학에 또 돌아간다면, 아마도 이 작가가 탈 것”이라고 서슴없이 밝혔다. 이 소설은 상징적 ‘밤’의 연속이다. 100년에 가까운 전쟁사를 암울하게 채색했지만, 작가의 언어는 곳곳에서 시학(詩學)의 광휘를 내뿜고, 환상의 숨결을 인간 사회에 불어넣어 새로운 신화의 세계를 창조했다. ‘가끔 추위가 되살아나 봄을 시샘하더니 이윽고 그 위로 여름이 덮쳤다. 전쟁은 끝날 줄을 몰랐다. 대지는 구토에 시달리는 거대한 짐승 같다. 하늘은 몇 세기에 걸쳐 한 번도 청소를 한 적이 없는 거대한 굴뚝처럼 시커멓다. 해마저 보이지 않는데 화덕 속처럼 덥다. 총을 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작가는 지상의 살육을 방치하는 신의 침묵에 분노한 인간의 외침을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증폭시켰다. 기독교 성경에서 야곱이 천사와 씨름을 벌인 일화를 바탕에 깔았다. 태초에 빛이 있었지만, 낙원 상실 이후 존재론적 암흑에 갇힌 인간의 삶과 꿈을 광풍(狂風)에 펄럭이는 ‘밤의 책’처럼 펼쳐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