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민 경제부 차장

김대중 정부 때 부총리를 지낸 진념 전 장관은 "군사 정권 시절 군 장성이 예산실을 찾아와 국방 예산을 더 달라고 권총을 머리에 대고 위협해도 까딱도 하지 않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국민의 세금을 지키는 후배 공무원들이 권력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는 용기와 뚝심을 가져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최근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긴급 재난지원금 100% 지급은 안 된다"고 버티다 결국 '윗선'의 지시에 무기력하게 굴복하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세상이 달라졌음을 새삼 느꼈다. 어느 전직 장관은 "예전에는 정치권이 관료들의 전문성을 존중해줬는데 요즘엔 선을 넘는다는 느낌이 든다"고 아쉬워했다. 다른 전직 관료는 한발 더 나아가 "테크노크라트 시대의 종말을 상징하는 것 같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1세대 테크노크라트인 오원철 전 수석과 김정렴 전 실장이 지난해와 올해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전문적 지식과 능력을 갖춘 관료를 뜻하는 테크노크라트는 고도 성장기 경제 정책을 주도하며 국정 운영의 한 축으로 인정받았다. 최고 권력자로부터 '국보'와 '경제 대통령'으로 대접받은 이도 있었고, "대통령 다음으로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 예산실장"이라는 말도 있었다. 지금은 정치인들로부터 "상상력이 부족하다" "답답한 소리 한다"고 면박받으며 돈 달라면 내주는 출납계원 같은 신세가 됐다.

약 60년간 이어진 테크노크라트의 시대가 이번 정권 들어 쓸쓸한 종말을 맞은 데는 대통령의 역할이 제일 클 것이다. 지난 3년간 두 명의 경제부총리를 쓰면서 문재인 대통령은 입버릇처럼 "경제 사령탑은 부총리"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전혀 힘을 실어주지 않았다. 말로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면서도 차마 사표 던질 배짱은 보이지 못한 홍 부총리에게도 책임이 있을 것이다. 한 경제 부처 과장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었어야 하는데…"라며 씁쓸해했다.

그러나 홍남기 아닌 다른 사람이 부총리였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답은 '아니다'에 가까울 것 같다. 테크노크라트의 쇠락은 마치 쇠에 녹이 슬듯 오랜 시간에 걸쳐 이뤄져왔기 때문이다.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권력은 점차 행정부에서 국회로 넘어갔고,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시장에서 관(官)보다 민간의 힘이 더 세졌다. 뭔가 일이 잘못됐을 때 경제 관료를 희생양 삼는 일이 반복되면서 복지부동(伏地不動)과 권력 눈치 보기도 심해졌다. IMF 외환 위기 때 강경식 전 부총리와 김인호 전 경제수석이, 론스타 사건 때 변양호 국장이 직무유기와 배임 등으로 구속된 사건은 공직 사회에 깊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이번 정권에선 전 정부 정책을 실행했다는 이유로 공무원들이 줄줄이 적폐로 몰려 감옥에 가면서 이런 경향이 극심해졌다.

한편으로 관료들이 누리는 보상은 과거에 비해 보잘것없어졌다. 예전엔 행정고시에 붙어 경제 부처에서 20년쯤 일하고 퇴직하면 유관 기관장이나 기업 고문, 대학교수 등으로 안락한 여생을 보냈다. 지금은 퇴직 후 갈 곳 없는 고위 관료들이 수두룩하다. 요즘 세종청사에 틀어박혀 보고서를 만드느라 야근하는 젊은 사무관들에게 "왜 선배들 같은 소신과 용기가 없느냐"고 묻는다면 코웃음을 칠 것이다.

테크노크라트 시대가 막을 내렸다면, 무엇으로 그 공백을 메울 것이냐는 문제가 남는다. 잘되면 '민주적 의사 결정'이 되겠지만, 잘못되면 '포퓰리즘'이라는 오명이 따라다닐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탈리아와 그리스는 후자 쪽이었다. 그러다 2011년 재정 위기가 닥치자 두 나라는 테크노크라트를 구원투수로 다시 불러들였지만, 정치인들이 망가뜨린 나라를 치료하기엔 한참 늦은 뒤였다. 이런 일이 우리나라에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