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대(對)국민 사과문에는 두 달 전 삼성준법감시위원회가 요구한 핵심 조건이 모두 담겨 있다. 준법감시위는 경영권 승계 논란과 노조 문제에 대한 사과와 함께 시민사회와의 소통, 재판과 상관없이 준법감시위 활동 보장을 약속하라고 권고했다. 이 부회장은 자신의 횡령·뇌물 혐의 파기환송심 재판부 요구에 따라 출범한 준법감시위 요구 사항을 참모진의 우려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스란히 들어줬다. 본인이 직접 사과문을 쓴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대해, 20여년간 삼성을 괴롭혀온 '경영권 승계' 이슈를 끊어내고, 앞으로의 비전을 제시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나왔지만 "세계적 기업의 수장이 정치적 압력에 굴복한 치욕적인 날" "국민 정서에 기대 재판에서 감형받으려는 이벤트"라는 비판이 엇갈렸다.

이재용의 '새로운 삼성' 선언

이 부회장은 2014년 부친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쓰러진 뒤 6년여간 삼성을 이끌어 온 경험에 대한 소회와 포부를 밝혔다. '새로운 삼성'을 두 차례 강조하며 국격에 어울리는 삼성을 만들겠다고도 했다. 이 부회장은 "큰 성과를 거뒀다고 자부하기는 어렵지만, 미래 비전과 도전 의지를 갖게 됐다"며 "한 차원 더 높게 비약하는 새로운 삼성을 꿈꾸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혁신과 기술력으로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면서 신사업에도 과감하게 도전하겠다"고 해 조만간 대규모 신사업 인수합병(M&A)이 이뤄질 것임을 시사했다. 삼성그룹은 2016년 11월 전장사업 본격화를 위해 미국의 전장 전문 기업 하만을 80억달러(약 9조8000억원)에 인수한 뒤 빅딜이 전무했다. 이 부회장은 또 "제 아이들에게 회사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을 생각"이라며 "훌륭한 인재들이 주인 의식과 사명감을 갖고 치열하게 일하면서 저보다 중요한 위치에서 사업을 이끌어가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이런 일이 자신의 책임이자 사명이라며 앞으로 전문 경영인 중심의 경영을 더욱 강화할 것임을 예고했다.

회견장 떠나는 李부회장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6일 서울 삼성전자 서초 사옥에서 대국민 사과를 한 뒤 기자회견장을 떠나는 모습. 이 부회장은 “기술과 제품은 일류라는 찬사를 듣고 있지만 삼성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따갑다”며 “이 모든 것은 저의 잘못”이라고 말했다.

1남 1녀를 두고 있는 이 부회장은 오래전부터 자녀들에게 회사를 물려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주변 지인들에게 여러 차례 알렸지만, 대외적으로 공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부회장은 이 같은 발표 내용에 대한 주변의 만류에 "오래전부터 생각해왔고, 제 의지는 확고하다"며 뜻을 굽히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반면, 일각에서는 이 부회장의 '4세 승계 포기 선언'이 한국 재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삼성은 위기마다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오너 경영의 장점을 통해 성공했는데, 국내 최대 기업이 승계 포기를 선언한 것이 우리 기업 문화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삼성, 모든 계열사에 노조 생기나

이 부회장은 "이제 더 이상 삼성에서는 무노조 경영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며 '무노조 경영' 폐기 선언을 했다. 재계에서는 "삼성 모든 계열사에 노조가 생기는 것은 시간문제다. 삼성마저 한국의 후진적인 노조 문화에 휘둘리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는 우려 섞인 전망이 나왔다. 이미 2011년 삼성물산(옛 에버랜드)에 양대 노총 산하 노조가 출범한 데 이어, 2013년 삼성전자의 자회사인 삼성전자서비스, 2014년 삼성SDI 등에 노조가 들어섰다.

노동계와 진보 진영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한노총은 이 부회장의 대국민 사과 직후 "문제는 결국 실천"이라며 "삼성그룹 내 노동조합들은 임단협을 진행 중이거나 사측에 교섭을 요구하고 있지만 삼성은 여전히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다"는 논평을 내놨다. 경실련은 "국민들의 정서에 기대 재판에 영향을 미쳐보려는 이벤트에 불과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