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수 논설위원

200여 년 전 원조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와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 간에 금리(金利) 논쟁이 붙었다. 애덤 스미스는 대출금리를 연 5% 이하로 묶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 높은 금리를 허용하면 방탕하고 무모한 사업가들이 대출을 독점해 건실한 사람들의 대출 기회를 빼앗을 것이라는 논리였다. 반면 제러미 벤담은 "스미스 주장대로 건실한 사람만 대출을 받을 수 있게 하면 전통적 구식(舊式) 사업자들이 대출 특권을 독점하게 되고, 리스크를 안고 새 사업에 도전하는 혁신 사업가들은 돈을 빌릴 기회를 박탈당한다"고 반박했다. 두 거장의 논쟁은 고리대금업에서 출발해 자본주의 시장경제 시스템의 심장으로 진화한 은행의 기능과 존재 의미를 되짚어 보게 한다.

금융 기법 발달에 힘입어 현대 은행들은 금리·대출 기간 조정, 보증을 통한 신용 보강 등의 방법을 통해 구식 사업자와 혁신 사업가 모두에게 필요한 자금을 공급하고 있다. 이처럼 대출을 통한 신용 창출 기능을 가진 은행을 아무나 경영하게 할 순 없다. 정부가 엄격한 심사를 거쳐 면허를 주고, 사후에도 철저하게 감독한다. 은행들은 국가로부터 배타적 사업권을 보장받는 대신 수익성과 공공성의 조화를 추구하는 도덕적 의무를 진다.

우리나라 은행들은 최근 20여 년 사이에 크게 두 차례 국민과 국가에 신세를 졌다. 1997년 외환 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때다. 외환 위기 땐 무분별한 기업 대출로 대다수 은행이 부도 위기에 몰려 당시 한 해 GDP(국내총생산)의 13%에 해당하는 64조원의 공적 자금을 수혈받았다. 이른바 '손실의 사회화'로 기사회생한 셈이다. 글로벌 금융 위기 땐 은행들이 달러 유동성 위기에 몰리자 정부가 한·미 통화스와프, 450억달러 외환 공급, 1000억달러 대외 채무 지급 보증 등 대규모 지원 프로그램을 가동해 구제해주었다.

외환 위기 이후 은행 통폐합으로 몸집이 커진 은행들은 과점(寡占)체제하에서 공격적인 가계 대출로 덩치를 더 키우며 막대한 이익을 올려왔다. 은행은 억대 연봉과 최고의 복지를 제공하는 신의 직장이 됐고, 조기 퇴직자에게 3~4년치 연봉을 안겨주는 명퇴금 잔치를 해마다 벌이고 있다. '이익의 사유화'다.

은행들은 고비용·고복지를 뒷받침하기 위해 연 3조~4조원대 이익을 자동으로 안겨주는 예대마진으로도 부족해 고위험 투자 상품을 마구 팔아 천문학적 수수료 수입을 거둬들이고 있다. 고객들에게 고수익을 안겨주고 있다면 수수료 수입도 정당화되겠지만, 부족한 실력 탓에 원금까지 날리는 사태가 다반사다. 고객에게 수조원대 손실을 끼친 금리 연계 파생 상품(DLF) 판매, 라임자산운용 환매 중단 사태 등이 그런 사례들이다.

코로나 사태로 기업과 가계가 줄도산 위기에 처했다. 이런 사정은 선진국도 마찬가지다. 선진국 은행들은 배당과 임직원 보너스 지급을 중단하고 그 재원을 기업과 가계 금융 지원 자금으로 돌리고 있다. 우리 은행들에선 이런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파산 위기에 몰린 자영업자에게 급전 1000만원을 연 1.5% 이율로 빌려주는 소상공인 긴급경영지원자금이 조기에 동나자, 정부는 은행을 동원해 2차 소상공인 지원 자금 10조원을 대출해주도록 할 계획이다. 그런데 대출금리가 보증료까지 더하면 4%대까지 올라가 "이 판국에 이자놀이 하느냐"는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다. 은행들이 원가에 자금을 공급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1%대 금리도 불가능하지 않을 텐데, 은행들은 조금도 손해 보지 않겠다는 행태로 일관하고 있다. 국민에게 많은 신세를 져온 은행들이 이번엔 상생과 연대의 정신으로 '이익의 사회화'를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