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우리 집은 참 가난하게 살았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부터 아버지가 지병이었던 해수병과 여러 병이 겹쳐 몸져누우시자 돈벌이할 사람이 없어 생활고에 시달렸다. 조금 남은 양식마저 떨어져 끼니 잇기도 어렵게 되자 어머니는 한숨 섞인 걱정을 토해내시며 부엌에 앉아 섧게 우셨다.

집안 형편을 뻔히 아는 나는 그저 쪽마루에 걸터앉아 밀린 사친회비 달라는 말도 못 하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옷소매로 훔치기 바빴다. 밀가루 포대를 털어 수제비를 끓여 먹은 다음 날 아침, 급기야 어머니는 장롱에서 당신이 시집올 때 해 오신 옷감을 꺼내셨다. 장롱 속 깊은 곳에 넣어두고 고이 간직하며, 가끔 좀이 슬까 봐 거풍만 하던 어머니의 소중한 물건이었는데 과감히 누군가에게 팔아버린 것이다.

다음 날부터 어머니는 장사를 시작하셨다. 옷감 판 돈을 밑천 삼아 배추를 밭에서 떼어다 장이 서는 배다리 한 귀퉁이에 앉아서 팔았다. 장마 때는 도매상에서 비누를 떼어다 사과 궤짝 위에 놓고 팔기도 했는데, 완장 찬 노점상 단속원들에게 쫓겨 다니기 일쑤였다. 그도 잘 안 되자 가을엔 새우젓 장사로 업종을 바꾸었다. 연안 부두에서 새우젓을 받아 이고는 인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가다 영등포나 용산 어디쯤에 내려서 집집을 방문하며 판다고 했다. 고무신이 닳도록, 머리 밑이 헐 때도 어머니는 장사를 계속하셨다. 그 고달픈 희생으로 우리 가족은 두 끼니는 보리밥을 먹을 수 있었고, 한 끼는 수제비를 끓여 먹으며 힘든 세월을 버텨낼 수 있었다.

독 속의 양식이 간당간당할 때쯤이면 어머니는 늘 이고 다니시는 커다란 함석 대야에 며칠 먹을 식량을 사 오셨다. 반가워하는 우리에게 이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으시며 언제고 하신 말씀이 "느루 먹어야지. 느루 먹어야 할 텐데…"였다. 워낙 없는 살림이라 아끼고 줄일 것도 없던 시절, 보리쌀이라도 늘려 먹으려 감자며 옥수수, 온갖 채소까지 넣은 밥을 느루 먹으려 애쓰시던 어머니가 보고 싶다. 그때 물리도록 먹었던 보리밥인데, 별미 밥집에 와서 새삼 보리밥을 앞에 놓고 보니 어머니가 더욱 그립고 서러웠던 옛날이 생각나며 가슴이 아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