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명현 음악 칼럼니스트

"어두운 밤을 쉬이 받아들이지 마시오. 노년은 날이 저물수록 불타고 포효해야 하기 때문이니, 꺼져가는 빛을 향해 분노하고, 또 분노하시오." 영화 '인터스텔라'에 나온 대사다. 초반부와 후반부에 등장하며 영화의 주제를 관통한다. 이 대사는 딜런 토머스(1914~1953)의 시에서 따왔다. 노년의 삶은 결코 노을의 모습이 아닐 거라고 말한다.

이 시처럼 노년을 쉬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피아니스트가 있다. 오스트리아 빈을 대표하는 파울 바두라스코다(1927~2019)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눈감는 순간까지 무대에 올랐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사명을 가지고 음악을 대했다. 지난해 10월 서울에서의 공연도 약속했다. 하지만 공연 한 달 전 타계 소식이 들려왔다. 이제는 별이 된 것이다. 눈감는 순간에도 관객들과의 약속을 떠올렸을 사람이다.

아쉬움에 유튜브로 그의 말년 연주를 보았다. 그는 천천히 걸어나와 피아노 앞에 앉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내 연주를 시작했다.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흘렀다. 연주가 눈물나게 아름다워서였냐고? 아니다. 그에게서 나이에 저항하기 위한 몸부림이 보였기 때문이다.

노화에 따라 손실된 근력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여러 가지 시도를 감행했다. 그중 가장 처절했던 건 '핑거링'이었다. 작곡가가 의도한 음량을 구현하기 위해선 한 개의 손가락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대목들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검지와 중지를 겹쳐 건반을 내려쳤다. 중량을 보태 모자라는 힘을 대신한 것이다. 아름다운 구절을 듣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감동이었다.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클래식 버전이었다.

랜선으로 본 연주였지만, 그의 열정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냈다. 가장 뜨거웠던 연주였다. 바두라스코다는 딜런 토머스가 말했던 구절들을 온몸으로 실현하고 있었다. "어두운 밤을 쉬이 받아들이지 마시오. 노년은 날이 저물수록 불타고 포효해야 하기 때문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