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부여 부소산성에서 백마강 건너 작은 산이 있다. 물에 떠내려온 산이라 해서 '부산(浮山)'이다. 부산에는 대재각이라는 정자가 있다. 클 대(大)에 어조사재(哉)에 집 각(閣)이다. 전(殿)에 이어 궁궐에서 둘째로 큰 건물을 '각'이라 하는데, 이 작은 집 이름이 대재각이다.

안에는 큰 바위가 하나 있고 바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至痛在心 日暮途遠(지통재심 일모도원).' '(병자호란의 치욕에) 극심한 고통이 마음속에 있는데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구나.' 1650년 12월 30일 영의정 이경여가 올린 사직 상소에 갓 취임한 효종이 내린 답이다.

효종은 병자호란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이경여는 병자호란 이후 공식 문서에도 청나라 연호 '숭덕'을 쓰지 않던 강경파였다. 이를 고깝게 본 청 황실은 조선 정부에 "이경여를 시골로 보내라"고 압력을 넣은 터였다. 효종은 사표를 받으며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다(일모도원)'고 안타까워했다.(1650년 12월 30일 '효종실록')효종이 말한 '일모도원'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꼭 이루고야 말겠다'는 뜻도 숨어 있다.

훗날 송시열이 위 여덟 자를 크게 써서 이경여 문중에 주었다. 여덟 글자 가운데 '너무나도' 혹은 '지극히'를 뜻하는 '至(지)' 자가 가장 컸다. 또 훗날 이경여의 손자 이이명이 고향 부여 바위에 이를 새기고 비각을 지었다. 임금 말씀을 모신 곳이라 해서 '큰 말씀을 모신 각(閣)'이라 했다. 1700년이었다.

때는 전 지구적으로 극심한 가뭄을 겪는 소빙기(小氷期)였다. 조선은 굶주린 사람들이 '살아 있는 사람 고기를 먹고 죽은 사람 옷을 벗겨서 입는(噉生人之肉 剝死屍之衣·담생인지육 박사시지의)' 대참극의 시대였다.(1697년 2월 10일 '숙종실록')

17세기 조선을 침몰시킨 대기근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극심한 기근에 시달렸다. 임진왜란 와중인 1593~1594년 계갑대기근부터 정묘호란 전후 병정대기근(1626~1629년), 1670년과 1671년의 경신대기근은 모두 '대(大)'가 붙는 초대형 참화였다. 그리고 1695년 2년 연속 또 대기근이 덮쳤다. 을해년과 병자년을 휩쓴 이 기근은 '을병대기근'이다.(김문기, '강희제의 해운진제와 조선의 반응', 역사학연구 53, 2014)

충청남도 부여 백마강변 부산(浮山) 기슭에 큰 바위가 있다. 바위에는 '至痛在心日暮途遠(지통재심 일모도원·극심한 아픔이 마음속에 있는데,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라고 새겨져 있다. 1650년 효종이 영의정 이경여에게 내린 말이다. 1700년 이경여 손자 이이명이 여덟 글자를 바위에 새기고 비각 '대재각'을 지었다. 비각 건립 무렵 조선은 '굶주린 사람들이 산 사람을 잡아먹는' 대기근을 겪고 있었다. 1697년 숙종은 청 황실로부터 구휼미 5만 석을 받았다. 1704년 노론은 명 황제를 기리는 만동묘를 지었다. 그리고 2년 뒤 이들은 "대명 의리를 어기고 썩어빠진 오랑캐 쌀을 받은" 실무자 처벌을 요구했다. 1704년은 명나라가 망한 지 1주갑(60년) 되는 해였고, 청에 구휼미를 요청한 1697년은 병자호란 종전 60년 되는 해였다. 실무자는 병자호란 주화파 최명길의 손자 최석정이었다.

임란 때는 '길에 쓰러져 죽은 시신은 붙어 있는 살점이 없고, 사람 고기를 먹으면서도 전혀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 참극이 벌어졌다.(1594년 1월 17일 '선조실록') 정유재란이 끝나고 명나라 군사는 남은 군량미 12만 석을 조선에 넘기고 돌아갔다. 조선 정부는 "온 나라 신민과 함께 감격하고 더욱 자강하도록 계책을 도모하겠다"고 감사 자문을 보냈다.(1601년 4월 25일 '선조실록')

17세기 지구를 바꾼 소빙기

17세기 인류는 문명이 시작된 이후 가장 추운 시기를 경험했다.(조지형, '17세기, 소빙기, 그리고 역사 추동력으로서의 인간', 이화사학연구 43, 2011) 이를 사람들은 '소빙기(小氷期)'라고 부른다. 1627년 정묘호란 직후 후금 태종 홍타이지는 곡식 국경 시장 개설을 강력하게 요구했다.(1627년 12월 22일 '인조실록') 명나라는 1639~1642년 기황(奇荒·기이한 가뭄)이라 부르는 기근을 넘지 못하고 청에 멸망했다. 일본에서는 간에이 대기근(1641~1643)으로 수만 명이 죽었다.(김문기, '17세기 중국과 조선의 기근과 국제적 곡물유통', 역사와 경계 85, 2012)

청과 조선의 가뭄 대책

소현세자가 심양에 끌려가 있던 1640년 청나라 또한 기근에 시달렸다. 결국 청은 소현세자 일행에게 곡물 지급을 중단하고 "직접 농사를 지으라"고 요구했다. 나아가 1645년 청 황실은 조선에 구휼미 20만 석을 요구했다. 가뭄이 극심했던 조선은 이를 10만 석으로 깎아 북경과 심양으로 보냈다.(김문기, 2012)

1695년 을해년 10월 8일 숙종이 말했다. "올해 기근이 거의 경술·신해년보다도 심하다."(1695년 10월 8일 '숙종실록') '경신대기근'은 1670~1671년 현종 때 벌어진 기근이다. 한여름에 눈과 서리가 내리고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은 자가 100만이었다. 1671년 6월 형조판서 서필원이 청에 곡식을 요구하자(청곡·請穀)고 제안했다. 남인인 영의정 허적은 인조 때 10만 석 강제 지원을 들어 반대했다. 1675년 숙종 1년 남인 윤휴가 다시 청곡을 제안했다. 이번에도 허적이 반대했다. "청나라 은혜는 받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不欲受恩於淸也·불욕수은어청야)." 제안은 또 무산됐다.(1675년 7월 27일 '숙종실록')

을병대기근과 숙종의 결단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人相食·인상식) 변이 각 고을로 번지니 사방을 둘러봐도 살아날 방도가 없다."(1699년 8월 16일 '승정원일기') 임진왜란 이후 100년 만에 들이닥친 국가적 파멸 정국이었다.(김문기, 2012) 1693년에서 1699년 사이에 인구가 141만명 넘게 줄어든 파멸이었다. 1696년 마침내 노론인 부제학 이유가 "도저히 해결할 방법이 없다"며 청나라에 청곡을 다시 제안했다. 세상은 이제 '아비가 자식을 죽이고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으며 용과 뱀처럼 악독해진' 지옥이었다.(1697년 4월 22일 '숙종실록')

부여 부산 기슭에 있는 '대재각'. '임금의 큰 글을 모신 전각'이라는 뜻이다.

그해 5월 대사간 박태순이 국경 시장에서 교역으로 쌀을 들여오자고 제안했다. 9월 청나라에 출장 갔던 주청사인 우의정 최석정이 돌아왔다. 숙종은 최석정의 보고에 따라 구매가 됐든 원조가 됐든 무조건 청곡 사신을 보내라고 명했다.(1697년 9월 21일 '숙종실록')

청나라 강희제의 구휼미

보고를 받은 강희제는 곧바로 원조를 결정했다. '백성이 살 방도가 없다니 측은하다. 그 나라 왕이 청하는 바에 따라 무역을 할 수 있게 하라.'(1698년 1월 3일 '성조인황제실록')

이에 따라 청은 시중에서 구매한 쌀 4만 석과 황제 하사미 1만석을 배와 수레에 실어 조선으로 보냈다. 쌀은 1698년 2월 말 2만석을 시작으로 4월까지 모두 조선으로 들어왔다. 청나라 이부시랑 도대(陶垈)가 배 110척에 싣고 온 3만석을 우의정 최석정이 맞이했다. 그해 7월 강희제는 '해운진제조선기(海運賑濟朝鮮記)'를 지어 자기 치적을 과시했다. 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조선 국왕 이돈(李焞)이 간구해 그 청을 바로 윤허해주었다.'(1698년 7월 10일 '성조인황제실록')

춘추대의에 반하는 구걸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청나라에 구휼미를 요청한 그해는 1697년 정축년이었다. 바로 병자호란 끝에 삼전도에서 굴욕적으로 항복한 1637년 정축년으로부터 1주갑이 된 해였다. 노론 강경파들이 곧바로 들고일어났다.

청 황제 강희제는 조선에 구휼미 5만 석을 제공하고, 이를 기념하는 '해운진제조선기(海運賑濟朝鮮記)'를 직접 지었다. '바다로(쌀을) 운반해 조선을 구제한 기록'이라는 뜻이다.(오른쪽·1698년 7월 10일 '성조인황제실록')이 기록에는 '큰 창고에 있는 옥처럼 흰 쌀(太倉玉粒·태창옥립)로 구제했다'고 적혀 있다. 반면 조선 사헌부 집의 정호는 "쓸데없는 다 썩은 쌀(無用之紅腐·무용지홍부)"이라고 했다.(1698년 4월 29일 '숙종실록')

원조 완료 다음 달인 1698년 5월 이조 참의 김성적이 숙종에게 상소했다. "(쌀을 사는 데 은화를 탕진해) 재물을 소모하고 나라를 병들게 했다." 게다가 청나라 이부시랑 도대가 가져온 문서에는 '황제가 베푸는 비상한 은혜'라 적혀 있었고, 도대는 숙종에게 자신을 '권제(眷弟·동년배에 대한 겸양어)'로 소개하고 있었다.(1698년 5월 5일 '숙종실록') 이들은 구휼미를 호미(胡米), 노미(虜米)라 부르며 경멸했다. 나주목사 유명건은 '오랑캐 쌀을 치욕으로 여겨 분배 목록에서 스스로를 제외해 남들처럼 구걸하지 않았다'.(박필주, '여호선생문집' 30 나주목사 유공 행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무상 원조미 5만 석으로 조선의 참화는 잠시나마 안정됐고, 사대부와 상민 할 것 없이 '명을 할아버지로, 청을 아버지로 부르며 아무 괴로움 없이 서로 다퉈 받아먹었다(無不甘心爭食·무불감심쟁식).'(김간, '후제선생별집'2 잡록) "굶주린 백성이 전부 살아난다면 이게 바로 의리"(공조참의 오도일, '서파집'13 사직겸진소회소)라는 반박도 있었지만 노론은 강경했고, 집요했고, 끈질겼다.(이상 김문기, 2014)

사헌부 집의 정호는 '쓸데없이 다 썩은 쌀과 은을 바꿨고' '1만 석은 무상이니 후일이 두렵고' '무엇보다 춘추대의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청곡을 맹비난했다.(1698년 4월 29일 '숙종실록')

정치논리로 점철된 구휼 이후

노론은 이 모든 치욕의 주모자를 반드시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오랑캐 간부로부터 썩은 쌀을 인수한 실무자, 최석정을 파직하라는 것이다. 그해 5월 28일 사헌부와 사간원은 '사리와 체면을 잃고 훼손시킨 최석정을 파직하라'고 청했다. 8월까지 이어진 파직 요청에 결국 숙종은 최석정을 우의정에서 해임했다.(1698년 7월 20일 '숙종실록')

그러다 1700년 이경여의 손자 이이명이 고향 부여에 송시열 글씨를 받은 각석을 세웠다. 요지는 '무슨 수를 쓰든 반드시 복수하리라'였다. 명나라가 망하고 60년이 된 1704년 노론은 화양동에 만동묘를 세웠다. 이듬해 숙종이 "황제 제사는 왕만 올릴 수 있다"며 창덕궁에 대보단을 세웠다.

그러자 이듬해 노론이 또 시비를 걸었다. 최석정은 제사에 참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생 송무원이 숙종에게 상소를 올렸다. "그 집안 내림으로 오랑캐에 영합하고 명에 배반한다. 지난번 곡식 구걸은 물론 오랑캐 사신에게 오만한 문서도 받았다. 화의를 주장한 사람 손자로서 나라를 욕되게 한 죄인이다."(1706년 3월 3일 '숙종실록') 도대체 최석정이 누구인가.

병자호란 때 화친을 주도한 최명길의 손자가 최석정이다.

이번에는 숙종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송무원에게 유배형을 내렸다. 송무원은 송시열의 증손자다. 9개월 뒤 송무원은 사면됐다. 숙종에게 사면을 청해 받아낸 사람은 대재각을 세운 이이명이었다. 세상은 구휼이 아니라 정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