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테 결혼은 착각이었지. 내 울타리, 내 안정적인 삶의 기반, 온전한 내 것이라고 믿었으니까."

완벽한 결혼은 착각이었다. 드라마 '부부의세계' 속 지선우(김희애)는 그걸 알면서도 연민의 감정을 끊어내지 못한다. 가정을 파멸로 이끈 전 남편 이태오(박해준)를 결국 감쌌고, "지금 이 순간도 내가 돌아오길 바라고 있잖아"란 말에 속수무책 흔들렸다. 지난 2일 부부의세계는 시청률 24.3%(닐슨코리아 전국 기준)를 찍으며 비지상파 드라마 최고 시청률을 보유한 'SKY캐슬'(23.8%)을 뛰어넘었다.

'부부의세계' 주인공 지선우(왼쪽)는 남편의 생일파티에서 불륜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라고 항변하는 남편을 '인생에서 도려내겠다' 다짐했지만, 결국 연민이 발목을 붙잡는다. "아이 낳고 살아본 부부만 이해할 수 있다"는 평가에 '40세 이하 시청불가 드라마'라는 별명도 생겼다.

부부의 세계뿐 아니다. 대학 시절 만난 첫사랑과 학부모로 재회하는 tvN '화양연화',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불륜으로 이혼한 가정이 등장하는 KBS '한 번 다녀왔습니다' 등 중년의 사랑과 욕망을 그린 드라마들이 화제를 모으며 순항 중이다.

'부부의세계' 인기는 신드롬에 가깝다. 포털 검색 순위, 콘텐츠 영향력 순위 등 각종 지표 1위를 휩쓸고 있다. 연민과 애증으로 이어가는 부부의 관계와 중년 여성의 심리 묘사에 탁월하다는 평가다. 한 회가 끝날 때마다 인터넷 여성 커뮤니티가 '품평'으로 들썩이는 이유다. 자신만 빼고 모두 알았던 남편의 불륜, 배신감에 치를 떨던 지선우가 남편의 가슴팍에 가위 꽂는 장면을 상상할 때 시청자들은 강렬히 몰입했다. "본능은 남자한테만 있는 게 아냐. 여자라고 바람피울 줄 몰라서 안 피우는 게 아니거든" 같은 대사들엔 '사이다(시원하다)'란 반응이 쏟아졌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기존 막장드라마와 다른 지적인 복수극에 40~50대 여성들이 통쾌함과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원작인 '닥터 포스터'의 작가 마이크 바틀릿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메데이아(Medeia)에서 영감을 받아 '사랑'이라는 약한 고리에서 기인하는 관계, '부부'라는 숭고한 인연의 속성을 찾으려 했다"고 밝혔다. 그리스신화의 메데이아는 사랑하는 남자를 얻기 위해 아버지와 조국을 배신하지만 결국 버림받는다. 복수를 위해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까지 도구로 이용한다. 아들 준영을 숨긴 후 이태오를 자극하며 "평생 자식 잃은 지옥에서 살게 된 소감이 어때?"라던 지선우 모습이 메데이아와 겹친다.

불륜이 소재이지만 '가족' '이혼' 등 요즘 시대의 첨예한 화두와 맞닿은 감정을 치밀하게 묘사한 점도 성공 요인이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과거 불륜 드라마들은 외도하고, 이를 숨기다 들켜서 벌어지는 파국을 상투적으로 묘사해 왔지만 최근 드라마들엔 메시지가 있다"면서 "사람들은 '부부'라는 관계를 완전한 형태로 생각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깨지기 쉬우며 깨진다고 끝나는 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절실한 심리 묘사로 잘 표현했다. '한 번 다녀왔습니다'와 '화양연화'도 현대에서 하나의 선택지가 된 이혼과 젊은 시절의 순수와 열정 등을 밀도 있게 다루며 호응을 얻는 것"이라고 했다.

폭력적, 선정적인 연출은 문제로 지적된다. 하재근 평론가는 "잘 만든 드라마임은 분명하지만 불륜과 치정 문제를 너무 말초적으로 이용했다. 폭력 수위도 지나치게 높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