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

매주 신문에 칼럼 쓰는 일은 야구에서 투수가 던지는 볼 배합에 비유하고 싶다. 변화구를 던질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슬라이더, 또는 체인지업을 던진다. 어쩌다가 한번씩은 강속구도 필요하다. 같은 공을 계속 던지면 두들겨 맞기 때문이다. 관건은 채담(採談)이다. 다양한 차원의 이야기를 채취해서 저장해 놓는 채담가(採談家)의 기능을 항상 수행하고 있어야만 다양한 공을 던질 수 있다. 독서와 유적지 현장 답사도 채담가의 임무이지만 강단과 강호에서 이야기보따리를 가지고 있는 고수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아야 한다.

근래에 한번씩 찾아 뵙는 신복룡(78) 선생도 채담가의 생존 본능을 충족해 주는 이야기보따리를 가지고 있는 분이다. 대학에 있다가 정년퇴직했지만 구한말의 동학과 개화기에서부터 시작하여 해방 전후의 좌우익 충돌에 이르는 인간 군상, 혈연과 지연, 학맥과 풍습에 대해서 해박하다. 신 선생 당신도 대단한 채담가이자 문필업자인 것이다. 이 양반이 30대 중반인 1977년부터 매일 아침 7시 시작하는 5분짜리 라디오 프로에 출연하였다. 그날그날의 역사, 오늘이 무슨 날, 절기이고, 누가 죽고 누가 태어났는가 등을 간단하게 소개하는 프로였다. 어느 날 방송국 사장이 환한 표정으로 신복룡을 격려하였다. "매일 아침 박정희 대통령이 이 프로를 즐겨 들으신다. 청와대 뒤의 인왕산을 산책하는 아침 시간에 수행 비서로 하여금 꼭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휴대하게 한다. 신복룡 프로를 듣기 위해서이다. 들을 만하다고 칭찬하셨다." 박통 칭찬 이후 곧바로 방송국 사장은 신복룡의 방송 대본료를 2배로 대폭 올려 주었다. 대학 시간강사 시절에 이 돈은 큰돈이었다고 한다. 이 사정을 몰랐던지 프로 담당 국장이 바뀌면서 신복룡의 프로를 중단시켰다. 그랬다가 국장이 혼쭐났다. "각하가 즐겨 듣는 방송인데!" 사흘 만에 다시 방송을 시작했다. 당시 3년간의 방송 출연료(대본료)를 모아서 왕십리에 단독주택을 살 정도였다. 집 한 채는 살 수 있어야 프로페셔널 매설가라 할 수 있다.

이야기보따리 신 선생이 최근에 구한말 서양인들이 조선을 구경하고 쓴 ‘한말 외국인 기록’ 11책 23권(집문당)의 개정판을 냈다. 각주까지 달려 있는 번역서이다. 여기서 유대계 독일인 오페르트가 쓴 ‘금단의 나라 조선’이 흥미로웠다. 파렴치한 도굴범 수준을 뛰어넘는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당시 조선을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