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 물류창고 화재 참사 유족들이 모인 경기도 이천 모가체육관에서 1일 오전 김귀태(50)씨가 갑자기 "얼굴도 안 보여줘 놓고 부검부터 하겠다며 원주까지 오라니…" "내 아들이 실험 대상이냐"며 소리를 질렀다. 경찰에서 '아드님 신원 확인이 이제 끝났는데, 부검을 할 예정이니 참관하려면 원주로 오라'는 통보를 받은 직후였다. 김씨 아들은 이틀 전 창고에서 숨졌다. 하지만 김씨는 아직 아들 시신조차 보지 못한 상태였다.

이천 참사 유가족이 관청(官廳)의 홀대에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이날 하루에만 여러 차례 되풀이됐다. 유족들 사이에선 "사건을 빨리 덮고 치우려고 이러는 것 아니냐"는 불만까지 터져 나왔다.

1일 경기도 이천시 서희청소년문화센터에 차려진 물류창고 화재 희생자 합동분향소에서 한 유가족이 아이를 안고 영정 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시신 확인도 못 한 유족에 "부검" 통보

경찰은 반드시 시신의 신원이 확인된 다음에 유가족을 불러 시신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날 오전까지 김씨를 포함한 사망자 9명의 유가족은 가족의 마지막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고, 사흘째 신원 확인만 기다리고 있었다. 시신 9구가 육안 식별은커녕 지문이나 혈액 채취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이 심해 DNA 감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경찰이 "부검부터 하겠다"고 통보하자 유가족들은 격분했다. 한 유족은 "남편 얼굴 보려고 체육관에서 3일을 보내고 있는데, 너무한 것 아니냐"고 했다. 유족 반발에 경찰은 원주로 향하던 일부 시신을 다시 이천으로 되돌려 놓기도 했다.

미확인자 발표 지연… 유가족이 집계

일부 유가족에게 신원 확인 통보가 간 뒤에도 경찰은 몇 명이나 추가로 신원이 확인됐는지를 곧바로 밝히지 않았다. 결국 체육관에 있던 유가족 한 명이 직접 실내를 돌며 '부검 통보' 받은 사람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전화를 받지 못한 유가족은 "도대체 우리 애는 어떻게 된 거냐"고 울먹였다.

잠시 뒤 경찰 관계자가 부랴부랴 체육관을 찾아 "미리 알려 드리지 못했다"며 사과했다. 유족들은 관계자에게 몰려들어 "우리 애를 원주까지 옮기려면 말 한번 해줬어야 하는 것 아니냐" "'오든지, 말든지' 식으로 통보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따졌다.

시공사, 당시 안전관리자 숫자도 숨겨

이날 유족들은 시공사·감리업체 등 공사 관계자들에게 "화재 당시 안전관리자가 몇 명이나 있었느냐"고 따졌다. 공사 관계자들은 "경찰이 자료를 가져가서 잘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본지 취재에 따르면 시공사인 건우 측은 '공사 현장에 안전관리자 10명을 배치했다'고 이천시청에 신고하며 명단까지 제출했다. 총책임자 1명, 부책임자 1명이 있고, 그 아래에 분야별로 1~2명씩 배치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화재로 숨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본지가 만난 생존 근로자 가운데서도 안전관리자를 봤다는 사람이 없었다. 협력업체 성원알엔택 소속 한 근로자는 "까마귀가 근처로 오면 작업자끼리 '까마귀 떴다'고 알리기 때문에, 실제로 현장에 배치돼 있었다면 우리가 모를 수가 없다"고 했다. '까마귀'는 안전관리자를 가리키는 공사 현장 은어다. 산업안전기본법 17조는 공사 현장에 안전관리자를 두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④부시장에 유족 맡기고 시장 은 차 안에

오후엔 창고 시공사인 '건우'와 건축주인 '한익스프레스', 감리업체의 대표이사 등 공사 관계자들이 체육관을 사과 방문했다. 사고 이틀 만이었다. 전날 시공사 대표가 혼자 방문했다가 갑자기 쓰러졌고, "저녁에 다시 오겠다"는 약속도 어긴 뒤였다. 약속을 어긴 이유로는 "경찰 조사가 있다"고 했지만, 당시 조사는 없었던 걸로 확인됐다. 사과 연기를 이천시청과 조율했다는 얘기도 나왔다.

사고 당일 현장에서는 엄태준 이천시장 대신 권금섭 부시장이 유족을 만나 사과하고, 항의하는 유족을 상대했다. 엄 시장은 1일 기자들과 만나 "그때 나도 현장에 있었다"는 주장을 폈다. "장시간 있다 보니까 현장에 계속 있는 것이 저기해서… 바로 옆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는 제 차량에서 우리 직원들하고 소통하고, 회의도 했다"고 했다. 차 안에서 머물렀다는 얘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