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

박근혜 전 대통령의 옥중 편지가 나오게 된 뒷이야기를 들었다. 천막 당사 시절 신뢰를 쌓은 인사를 포함해 여럿이 보수를 구할 내용을 담은 메시지를 보내줄 것을 옥중의 대통령에게 전했다고 한다. 메시지에 담을 내용은 대략 두 가지였다. 첫째는 미래통합당으로 힘을 모아줄 것과, 둘째는 나(박근혜)를 밟고 나아가라는 내용이었다. 그 전갈이 통한 결과인지, 어찌 됐든 옥중 편지가 공개되었다. 편지 내용은 조금 부족했다. ‘미래통합당’ 대신 ‘현재의 거대 야당’이라고만 되어 있었고, ‘나를 밟고 가라’는 내용은 담겨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줌의 힘도 아쉬운 당시 야당에서는 그 정도 메시지에도 감읍하는 분위기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수감된 지 3년이 넘었다. 그동안 연동형 비례제를 둘러싼 선거법 개정으로 국회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자신이 국무총리에 임명한 황교안이 당대표가 되고, 의원들의 삭발 투쟁과 대표의 단식 투쟁도 있었지만 박 전 대통령은 계속 침묵했다. 여당이 총선 직전 박근혜를 석방해 야당을 교란할지 모른다는 온갖 정치공학이 호사가들 입에 오르내렸고, 무너진 보수를 일으키려는 사람들은 제발 옥중에서 "나를 밟고 나라를 살리라"는 한마디만 떨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 절박한 상황에 비추어보면 박 전 대통령의 옥중 서신은 늦은 감이 있고, 내용도 살신성인과는 거리가 멀다.

이제는 역사가 되어버린 지난 총선 기간 계속 궁금했던 것이 있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거대 야당'에 힘을 보태라고 했음에도,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각자의 작은 당에서 후보를 내고 열렬하게 지지를 호소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들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것 아니었나, 하는 의문이 내내 꼬리를 물었다. 그리고 처참하기까지 한 야당의 성적표를 받아 들고 난 후,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무도 박근혜 전 대통령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탄핵에 앞장선 배신자라는 둥, 탄핵을 막지 못한 무능력자라는 둥, 탄핵의 강을 건너야 한다는 둥, 서로 손가락질하며 소리를 높이던 사람들이 갑자기 아무도 탄핵을 이야기하지도, 박근혜를 거론하지도 않게 되었다. 탄핵의 강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정치인 박근혜도 더불어 사라졌다.

알다시피 탄핵의 강이란 하나의 은유다. 탄핵이라는 사건을 거대한 강으로 인식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표현일 뿐, 그런 강은 존재하지 않는다. 탄핵이 억울하고 기막힌 사람들이 상상 속의 강을 그어놓고 서로 나뉘어 비난하며 아우성을 쳤다. 출렁거리는 강 속에서 박근혜라는 조각배에 몸을 싣고 제 몸 하나 건사하려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지난 총선은 그 조각배도, 탁류가 흐르던 거대한 강도, 사실 모두 신기루였다는 것을 알려준 선거였다. 보수의 해답은 탄핵의 강 이쪽저쪽도 아니었다는 메시지를 준 선거였다.

지난 선거는 국민이 보수를 탄핵의 강에서 구해준 선거라고 할 수 있다. 거대한 은유로서 탄핵의 강이 설사 존재했다 하더라도, 세상은 그것과 무관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표가 말해주었다. 그러니 '리셋하라'는 것이다. 그동안 친이, 친박을 가르고, 다시 진박, 가짜 박을 감별하며, 엉뚱한 곳에서 길을 잃고 헤맨 대가가 어떤 것인지 가르쳐주었다. 탄핵은 한 사건일 뿐, 보수의 앞길을 막는 강줄기는 아니었다. 그런 정치 지형을 읽어내고 강을 넘을 필요 없는 다른 길로 용기 있게 국민을 이끌어줄 지도자를 보수는 갖지 못했다.

선거가 끝난 다음 날은 세월호 6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찬란한 성적표를 받아 든 여당은 성적표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세월호의 강'을 다시 상기시키며 국민 분열을 재개(再開)했다. 그 강 또한 상상 속의 강이다. 유족들에게는 평생을 가도 넘지 못할 가슴 아픈 강일 테지만, 정치인들에게는 이용 가치가 있는 고마운 은유의 강일 뿐이다. 정치적 효용이 다하는 날, 정치인들은 세월호를 버릴 것이다.

우리를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게 발목 잡는 역사의 강이 어디 그뿐이랴. 지금 정부의 단골 메뉴인 ‘친일의 강’이 그렇고, 아직도 뭔가 해결이 덜 된 ‘광주의 강’이 그러하며, 나라의 탄생 시점을 둘러싼 ‘건국의 강’이 또 그렇다. 그런 은유가 건재하다는 건 그 강의 정치적 쓸모가 남아있다는 방증이다. 그런 크고 작은 역사의 강을 용서와 화합으로 훌쩍 뛰어넘어 앞으로 나가기를 바라는 건 나만의 헛된 꿈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