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이야기’ <2회> “문화를 바꾸면 인간 본성을 교정할 수 있다” ◇"낡은 사상, 낡은 풍속을 척결하라"

아미라는 학부 2학년 때 내가 가르치는 ‘현대중국(Modern China)’을 수강했었다. 좋은 질문을 던지곤 해서 나는 그녀를 또렷이 기억한다. 토론토에 정착한 아프가니스탄 난민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친구다. 그 아미라가 첫 질문을 던졌다. 문화혁명은 문화를 바꾸는 혁명인가? 문화를 수단 삼아 사회를 바꾸는 혁명인가? 문화의 혁명인가? 혁명의 문화인가?

산시(陝西) 북부 옌안(延安)에서 대략 70만 당원을 이끌던 ‘동굴의 공산주의자’ 마오쩌둥은 1940년 1월 9일 문화협회의 강연에서 “문화혁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또한 문화혁명이 정치혁명에 복무한다고 말했다. 공산주의 이론에서 ‘문화’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다. 문화는 수단이다. 목적은 혁명이다.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 미화 포스터: "사구(四舊)를 척결하라! 사신(四新)을 세우라!" 왼쪽 깃발속의 문자는 마오쩌둥이 내걸었던 문화혁명의 구호 "조반유리(造反有理)."

그럼에도 마오는 문화혁명이 정치혁명과 통일전선을 이룬다고 말했다. 그는 문화를 바꾸면 인간의 본성까지 교정할 수 있다고 믿었다. 1960년대 마오는 전 인민들을 향해 “낡은 사상(舊思想), 낡은 문화(舊文化), 낡은 풍속(舊風俗), 낡은 습관(舊習慣)”을 척결하라 요구했다. 이른바 파사구(破四舊)의 슬로건이다. 낡은 것들을 제거하면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 마오는 힘들지만 가능하다 생각했다.

왕양명(王陽明, 1472-1529)에 따르면, 우리는 누구나 마음의 양지(良知)를 움직여 성인(聖人)이 될 수가 있다. 양지란 악의 기미(幾微)를 자각하고 제거하는 마음의 힘을 이른다. 양지 대신 마오는 “비판과 자아비판”을 제안했다. 그에 따르면, 공산당원들은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비판해야 한다. 또 누구나 스스로를 감시하고 비판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구폐(舊弊)와 악습(惡習)을 청산하고 “공산주의적 인간형”으로 거듭날 수 있다.

1850~60년대 ‘태평천국의 난’을 주도했던 홍수전(洪秀全, 1814-1864)은 어느 날 천상에 올라가 몸속의 썩은 장기를 들어내고 새 장기를 다시 받는 꿈을 꾸었다. 어려서 홍수전을 흠모했던 마오쩌둥은 전 인민의 재탄생을 희망했다. 그는 당원 모두에게 전면적인 “사상개조”를 강조했다.

명목상 마오의 문화혁명은 이기적 존재를 이타적 존재로 교정(矯正)하는 사회공학의 실험이었다. 인간의 뇌를 송두리째 세척한 후, 흰 천에 수를 놓듯 마르크스-레닌이즘을 아로새기는 작업이다. 외과의가 메스를 놀려 환자의 뇌 속에서 암세포를 도려내는 듯한 발상이다.

◇교차비판으로 티끌만한 허물까지 서로 폭로

1940년대 초엽 장제스(蔣介石, 1887-1975)는 충칭(重慶)에서 힘겹게 항일투쟁을 이어가고 있었다. 반면 오지에 비껴나 있던 마오쩌둥은 공산당 조직의 재정비를 위해 정풍운동(整風運動, 1942년-1944년)을 시작했다. 그가 문화혁명을 언급한지 불과 한 해 뒤의 일이었다.

당시 국민당 점령지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도시의 청년들이 4만 여명 옌안으로 몰려들었다. 마오는 그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사상개조”의 캠페인을 실시했다. 사상개조의 방법은 “비판과 자아비판”이었다.

마오는 큰 집회에 청년들을 모아 놓고 교차비판을 통해 티끌만한 허물까지 폭로하게 했다. 쉽게 말해 서로 멱살을 잡고 뺨을 때리게 하는 야만의 폭력집회였다. 동료는 적이 되었고, 친구는 밀고자로 둔갑했다. 비판은 광기의 마녀사냥이었다. 자아비판은 강요된 고백성사였다.

마녀사냥으로 “중죄”가 “폭로”된 청년들은 투옥된 상태로 국민당 간첩으로 몰려서 고문을 받았다. 채찍질, 손목 묶기, 무릎 꿇리기 등 전통적 고문방법 외에도 장시간 수면박탈의 방법이 동원되었다. 1943년 8월 15일 마오는 말했다. 너무 빨리 치지도 말고, 너무 오래 끌지도 말라. 잘 보고 있다가 딱 적당할 때, 바로 그때 일격에 교정하라! 누구든 고문에 못 이겨 간첩행위를 했다고 고백하면 인민재판에 불려나가 공범을 폭로하게 했다. 끝까지 결백을 주장하면 밧줄에 묶여 구치소로 끌려갔다. 그 과정에서 많게는 1만 명이 처형되었다.

대략 1944년 경 옌안의 대중집회에서 연설하는 마오쩌둥의 모습. 이 당시 그는 정풍운동(1942-1944)을 일으켜 당원에 대한 대규모 숙청을 감행했다.

지금 우리는 1942-44년간 거행된 옌안의 정풍운동(整風運動)을 돌아보고 있다. ‘10년 대겁탈’의 문화혁명은 바로 1940년대 정풍운동의 전국적 확대였다. 1940년대 이후 마오는 죽을 때까지 문화혁명을 벌이고 있었다. 중국의 정치는 온통 대중동원, 집단감시, 상호문책, 동료고발, 자백강요, 인민재판, 즉결처형, 우파사냥, 사상개조의 연속이었다.

옌안 시절 마오는 공포정치의 테크닉을 마스터했다. 1966-1976년의 문화혁명은 1940년대 정풍운동의 전국적 확대라 할 수 있다. 일평생 그는 문화혁명을 추구했다. 문화혁명은 중국 헌법 서언(序言)에 명시된 마오쩌둥사상의 요체였다. 알파이자 오메가였다.

◇마오, 소련에서 130만달러 지원받아 당권 장악

중국공산당의 어두운 역사를 접하는 학생들의 얼굴이 조금 굳어 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데, 초콜릿 껍질을 까서 입에 넣고 씹으면서 제니퍼가 물었다. 곱슬머리를 정성스럽게 땋고 두 볼엔 아기살이 통통한 흑인 아가씨다.

“좋은 의도가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역사의 아이러니인가요? 인간 개조를 강조했던 마오의 순수한 의도는 이해할 수 있을 듯해요.”

“어떤 식으로든 인간 본성의 근본적 개조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누구든 진정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진정 마오주의자(Maoist)라 할 수 있으리라.”

마오쩌둥을 오로지 공산 유토피아를 꿈꾸는 순수한 몽상가라 보면 큰 오산이다. 정풍운동 직전까지 마오는 당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일대의 정치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라이벌 왕밍(王明, 1904-1974)을 밀어내고 당내 최고지위를 획득했다.

왕밍은 모스크바 유학시절 소련공산당의 지도를 받은 ‘28명의 볼셰비키들’의 영수였다. 때문에 마오가 소련의 영향을 벗어나 독자노선을 갔다고 해석하지만, 구소련 비밀문서에 따르면 정반대의 해석도 가능하다. 마오는 오히려 스탈린의 강력한 지지를 얻었기 때문에 정치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1940년 3월 마오의 오른팔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는 모스크바에 직접 가서 미화 30만 달러의 혁명자금을 얻어 왔다. 1941년 7월 3일에 스탈린은 중공중앙에 미화 100만 달러를 추가 지원했다.

“모주석은 우리들 마음 속의 가장 붉고 가장 붉은 홍태양!” 마오쩌둥 인격숭배는 1940년대 옌안에서 시작됐으며, 1960년대 문화혁명 당시 최고조에 이르렀다.

소련의 지원을 확보해 당권을 장악한 마오는 이제 스스로 스탈린이 되고자 했다. 1941년 8월 마오는 1930년대의 기록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1931년-1934년 중공 내부투쟁의 역사를 다시 쓰게 했다. 마오는 스스로 당내의 독단론자, 주관주의자 및 좌파 기회주의자들을 물리치고 중국의 현실에 맞게 마르크시즘을 토착화했다고 자부했다. 또한 그는 레닌과 스탈린의 저작물을 깊이 탐구해 중국식 공산혁명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고 선전했다.

역사를 새로 쓴 마오는 이제 당원들을 향해 인격숭배를 요구했다. 정풍운동이 거세질수록 그의 권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마오에게 문화혁명은 권력 강화의 주문(呪文)과도 같았다.

☞<1회> “문화혁명은 10년간의 커다란 겁탈” 바로가기(▶bit.ly/3cLTCG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