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 선임기자

미래통합당이 망가지니 한 개혁파 의원이 뜨고 있다. 그는 “통합당은 자기가 죽은 걸 모른다”며 당 해체를 주장해 매스컴의 주목을 받는 중이다. 선거 전에도 자신이 몸담은 정당을 “좀비 정당” “역사 민폐”라고 떠들었다. 그는 박근혜 탄핵 과정에서 탈당했다가 여의치 않아 복당한 사람이다. 여의도연구원장에 이어 공천관리위원을 맡았다. 총선 패배에는 그가 책임져야 할 몫이 있다. 설령 맞는 말이라 해도 자신은 나서서 떠들 자격이 없는 것이다.

선거 참패의 충격은 이해하지만, 요 며칠 사이 나오는 보수 야당과 관련된 비판 발언들은 뭔가 이상하다. "낡은 보수 이념을 버려야 산다"느니 "보수 가치가 시대 흐름에 뒤처졌다"고 말한다. 보수 가치가 낡았다면 표를 얻기 위해 정당 간판을 진보 정당으로 바꿔 달자는 것인가.

이들은 '김정은 정권의 대변인'이라는 모욕을 받던 현 정권의 대북 정책 실패를 목격했으면서도, 이제는 "보수 야당은 대결 위주의 경직된 대북관이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심지어 자유시장경제는 냉혹하고 진보 진영의 평등·분배는 따뜻하다는 식으로 대비했다. 더 압권은 "반대를 위한 반대가 버릇이 돼 국회 보이콧과 장외투쟁을 일삼는다는 여론의 비판이 참패 요인"이라고도 했다. 소득 주도 성장, 주 52시간제, 탈원전, 사법부와 헌법재판소 장악, 준연동형 선거제, 공수처법 등을 막기 위해 싸운 것이 이제 와서 국정 운영의 발목을 잡은 것처럼 됐다. 정부 여당의 논리를 들고 와 참패한 보수 야당을 때리는 것이다.

소위 '웰빙 보수'가 이런 부류다. 문재인 정권의 좌파 독주를 막으려는 투쟁 현장 어디에도 이들은 없었던 게 틀림없다. 작년 가을 광화문에 몰려나온 대규모 인파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도 생각해본 적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광화문 인파를 보수 표를 갉아먹은 세력으로 치부하고 있다. 선거 참패의 충격이 얼마나 컸으면 이들은 문 정권의 오만과 무능, 위선에 대한 기억마저 지워버렸다. 조국 사태를 그렇게 겪고도, 이제는 '공정과 정의라는 화두에 보수는 관심이 없었다'며 총부리를 거꾸로 겨눈다.

선거 패인에 대한 치열한 논쟁, 자기반성과 성찰은 반드시 필요하다. 당 체질 개선을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하지만 중심을 잡아야 한다. 가치 전도(顚倒)와 자해 소동까지 가는 것은 옳지 않다. 잠깐 유행에 편승해 팔랑귀처럼 움직여선 안 된다. 아무리 선거에 참패하고 저쪽 표가 많아 보여도 보수로서 지켜야 할 선을 허물면 안 된다. 보수당을 찍은 유권자들은 "그동안 내 상식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내가 잘못 살아왔나, 의문을 갖게 됐다"고 말하고 있다.

야당이 참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100가지나 있다. 하지만 국정을 책임진 여당의 문제도 그 못지않거나 더 심각했다. 여당의 압승이 결코 문재인 정부의 지난 3년에 대한 평가는 아니라는 뜻이다. 정상적 선거에서 이긴 것이 아니었다. 코로나 사태와 경제적 절박함에 몰려 정권에 힘을 실어준 것이었다. 예외적 상황의 선거였지만 양당의 전체 득표 수 차는 실제 그리 크지 않았다.

지금 보수 야당은 진보 이념 쪽으로 더 가지 못한 점을 한탄할 게 아니라, 보수 가치를 지키려는 맑은 영혼이 없었다는 점을 더 반성해야 한다. 보수 가치는 낡은 것도 아니다. 개인·자유·경쟁·법치·전통·시장경제 등의 보수 가치를 우리 사회에서 낡게 보이도록 한 것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 무엇이든 식상하면 외면받는 것이다.

보수 정당이라면 시대 흐름에 올라타 그 가치를 세련되게 보이도록 할 의무가 있었는데도 안 한 것이다. 보수는 결코 '꼰대'가 아니라 '품격'임을 먼저 보여줘야 했는데도 못 한 것이다. 보수 정당은 젊은 세대로 외연을 확장하는 데 왜 실패했는지 묻고 그 전략 부재를 반성해야 한다.

앞으로 더욱 상상 이상의 일이 현 정권에서 벌어질 것이다. 울산시장 선거 개입과 라임·신라젠 등 권력형 비리 사건 수사는 덮일 공산이 높다. 윤석열 검찰총장을 코너로 몰고 갈 것이다. 완전히 기울어진 의석 수에다 온갖 정치적 술수와 선전 선동을 동원해 정권은 자신의 목표를 향해 질주할 것이다. 보안법 개정, 토지 공개념 적용, 정치 체제를 바꿀 헌법 개정도 시도할 수 있다.

이 힘센 정권과 맞서려면 보수는 고난의 길을 각오해야 한다. 80세의 김종인 비대위원장에게 모든 운명을 맡기는 식으로 너무 쉽고 편한 답을 구해서는 안 된다. 당의 방향과 진로, 자기 책임에 대해 더 치열한 논쟁과 반성이 필요하다. 보수의 품격에 안 맞는 내부 총질도 멈춰야 한다. 당 안에서 인재를 키우고 만들어야 한다. 이는 자신을 버리고 상대를 빛나게 해줄 때만 가능하다. 주연이 아니라 들러리를 맡겠다고 서로 다투면 당의 미래가 있다. 2년 뒤 대선에서 겨우 한번 해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