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수석 과학자(Chief-in-Science)’ 총리로 돌아왔다. 메르켈 총리(65)는 2018년 10월29일 총선에서 크게 진 뒤 지금의 임기를 마치는 2021년 이후엔 “어떠한 정치적 자리도 추구하지 않겠다”고 은퇴 선언을 했다. 독일 사회가 극좌·극우 양극단의 포퓰리즘에 휩싸이면서, 합리적이고 조용한 메르켈이 설 자리는 없어보였다. 전세계 언론은 2005년부터 독일을 이끌어온 이 장수(長壽) 총리의 정치적 유산을 앞다퉈 내보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20일 코로나바이러스 대책 각료 회의를 마치고 발언하고 있다.


그 메르켈이 코로나바이러스의 늪에서 독일을 이끌어내면서 부활했다. 독일에 코로나 환자가 발생한 것은 1월28일. 유럽 최초였다. 인구 8300만 명의 독일 전체를 휩쓸었고, 21일까지 14만8000여 명이 감염돼 5086명이 숨졌다. 엄청난 희생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2만4648명 사망)·스페인(2만1282명)·영국(1만7337명)·프랑스(2만796명) 등 유럽의 다른 주요국들과 비교하면 크게 선전(善戰)했다. 그리고 지난 15일에는 유럽 국가 중에서 처음으로 그 동안 강력하게 취했던 비즈니스 폐쇄·휴교 등의 사회적 봉쇄 정책에서 벗어나 점진적으로 정상화하겠다고 밝혔다.

독일이 다른 경로를 갈 수 있었던 비결은 메르켈이 정책 결정을 내리면서 철저하게 의존한 '과학'이었다. 메르켈은 독일 내 저명한 과학연구기관 전문가들과 수시로 논의했고, 증거와 과학적 결론을 좇았다. 메르켈은 그 자신도 양자 화학(quantum chemistry) 박사인 과학자다. 그래서 정치인이 된 뒤에도 너무 이성적이고 건조하다는 비판이 따랐다.

그러나 메르켈은 이번 코로나 재앙에서 독일 의학계가 합의하는 정보들을 독일인과 공유했고, 바이러스에 대해 아직 모르는 점들도 솔직히 시인했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독일인 전체의 감정에도 호소했다. 3월18일 휴교(休校)와 함께 경제활동 대부분을 멈추는 강력한 봉쇄(lockdown) 정책을 발표하면서, 메르켈은 "2차대전 이래, 우리 모두가 단합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시기를 맞은 적이 없다"며 "모든 국민이 이 일을 정말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면 이 시험을 통과할 수 있다"고 호소했다. 이후 독일은 1일 10만 명씩 진단 테스트를 하고 감염자들의 경로를 철저히 추적하고, 의료시설의 중환자실 수용 능력도 급격히 키웠다. 독일 감염자들의 평균 연령이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어린 것도 사망자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됐다.

지난 15일 메르켈은 점진적인 봉쇄 해제를 발표하려고 다시 국민 앞에 섰다. 그는 "환자들로 병원과 의료진이 마비되는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면서 "깨지기 쉬운 잠정적 성공"이라고 신중하게 평했다. 그는 이날 5월부터 고학년생들은 등교하고 일부 상점은 영업을 재개할 수 있도록 하겠다며, '기초감염재생산수(R0)' 논리를 국민들에게 설명했다. R0는 감염자 1명이 바이러스를 옮기는 환자의 수로, 이 수치가 1 이하이면 시간이 지날수록 바이러스 감염 건수는 크게 줄고, 1이면 현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그는 "지금 이 숫자는 1이지만, 이게 1.1만 돼도 독일 의료시설은 10월에는 포화상태에 도달하고, 1.2가 되면 7월에, 1,3이 되면 6월에 의료시설은 한계에 도달한다"고 알렸다. 메르켈은 "백신도 없는 상태에서 우리에게 얼마나 (봉쇄 해제의) 여유가 없는지 여러분도 알 것"이라며 "조금씩 소규모로 사회적 봉쇄를 해제하고 2주마다 평가해 다음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다.

베를린보건연구소의 대표인 악셀 라들라크 프라이스는 "독일 국민은 총리가 매우 정확한 정보를 전할 뿐 아니라, 모르는 점은 솔직히 시인하는 것을 안다"며 "이런 신뢰가 있기 때문에 온갖 허위 정보 속에도, 독일인들은 규칙을 따르고 침착한 상황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라고 독일 언론에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