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총선에서 유권자들은 높은 투표율로 미래통합당을 가혹하게 심판했다. 전문가들은 "민심(民心) 흐름을 포착하지 못하고, 도리어 진영 대결로 몰아간 통합당의 '역주행'에 책임을 물은 것"이라고 패인을 분석했다. 우리 사회의 전통적인 이념 지형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관측도 제기됐다.

미래통합당 김종인 총괄선대위원장이 16일 오전 국회에서 4·15 총선 패배와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야당도 변화하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이겠다"며 "이번 총선에서 드러난 국민 마음을 잘 새겨 야당도 변화하지 않을 수 없어졌다"고 했다.

①팽팽했던 이념 지형 再編

최근 양강(兩强) 구도로 치러진 대선에서 각 진영의 단일 후보들은 팽팽한 균형을 유지해왔다. 18대 대선에서 보수 후보(박근혜)가 51.55%, 진보 후보(문재인)는 48.02%를 얻었다. 16대 대선에서는 반대로 진보 후보(노무현) 48.91%, 보수 후보(이회창)는 46.58%를 각각 득표했다. 3%포인트 안팎의 격차에서 승부가 난 것이다.

하지만 4·15 총선에서 범보수 진영이 전체 의석의 36.6%(110석)를 얻는 데 그치면서, 유권자 진영 구도가 재편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팽팽한 균형을 유지했던 우리 사회의 이념 지형이 바뀌어, 이제는 보수보다 진보층이 두꺼운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총선 결과에 대해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페이스북에 "한국 사회의 주류(主流)가 산업화 세력에서 민주화 세력으로 교체됐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썼다. 이번 총선을 계기로, 진보 진영으로 '정치 기득권'이 넘어갔다는 것이다.

이념 지형 재편의 요인으로는 세월호 참사, 대통령 탄핵, 경기 침체가 거론된다. 대통령 탄핵이 보수 진영의 이탈 현상을 촉진했고, 장기적인 경기 침체가 이 같은 이탈 속도를 가속화했다는 분석이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경제 분노'가 차오른 상태에서 치러진 이번 선거에서 통합당이 실용적 접근보다는 이념 대결에 가까운 '심판론'을 꺼내 들자 민심의 총구가 정부에서 야당으로 바뀐 것"이라고 했다.

②野, 民心 변화에 역주행

통합당은 '바닥 민심'에서 진행되는 이 같은 흐름을 감지하지 못했다. 선거를 사흘 앞두고 나온 당 싱크탱크 여의도연구원 조사에서 '수도권 60대 지지층이 대거 이탈하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지만, 이 같은 현상을 두고 누구도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통합당 관계자는 "60대 지지층은 무슨 일이 벌어져도 보수 정당 지지를 철회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깨진 것"이라고 했다. 통합당 김세연 의원은 "정치 환경이 변화하고 있는데 이것을 감지하지도 못한 채 강경 지지층에 휘둘린 결과"라고 했다.

보수 이탈이 발생하는 상황에서 통합당은 거꾸로 선거 구도를 진영 대결로 몰아갔다. 팽팽한 이념 지형에서 맞대결하면 우세하다는 판단에서다. 결론적으로 패착이었다. 박성민 정치컨설팅 '민' 대표는 "이념 지형 자체가 다 넘어간 상태에서 보수가 아직 주류인 줄 착각하는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며 "탄핵 이후 자유우파 결집론이라는 배타적인 강경 노선으로 가면서 중도층이 대거 이탈했다"고 했다.

③대안 정당 자리매김 실패

통합당은 "대안 정당으로서 자리매김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뼈아프게 받아들이고 있다. 당내에서도 "이번 선거 과정에서 탈원전·소주성 폐지를 주장했지만, 구체적인 대안 제시에는 실패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다. 김형준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정권을 심판해야 한다'가 아니라, '경제가 살아야 우리의 삶이 좋아진다'는 메시지로 갔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또 구심점 역할을 해야 할 황교안 대표가 대권 주자로서의 경쟁력을 상실한 부분도 '대안 정당의 면모'를 보여주지 못한 대목으로 거론된다. 총선 직전인 지난 7~8일 한국갤럽 조사에서 황 대표의 차기 대권 주자 적합도는 8%에 불과했다. 이는 여권의 이재명(11%) 경기도지사에게도 뒤진 것이었다.

수도권 참패의 직접적인 원인은 '공천 파동'이라는 데에 당내 이견(異見)이 없다. 비례 정당인 미래한국당 득표율이 33.8%로 선전한 것을 감안하면, 접전지 의석 상당수가 공천 악영향으로 날아갔다는 주장이다. 개혁적 보수로 평가받는 윤평중 한신대 교수는 "국민의 선택은 자칭 보수 정당의 해체를 명령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합리적이고 개혁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한 미래는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