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시대 핵실험은 인류가 잊고 싶은 아픈 역사이다. 하지만 어두운 면이 있으면 밝은 면도 있는 법이다. 과학자들은 핵실험의 유산을 과학 연구에 십분 활용하고 있다. 핵실험으로 대기에 급증한 방사성 탄소 동위원소를 이용해 장수(長壽) 동물의 나이를 정확하게 측정했다. 반대로 나이를 속인 자들도 잡아냈다. 가짜 위스키에서 가짜 그림까지 핵실험의 후광에 실체가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멸종 위기 고래상어 나이 최초로 확인

미국 럿거스대의 조이스 옹 박사와 호주 해양과학연구소(AIMS)의 마크 미컨 연구원 공동 연구진은 지난 6일 국제학술지 '첨단 해양과학'에 "연대가 불분명하던 고래상어 사체의 나이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①호주 해양과학연구소(AIMS)의 마크 미컨 연구원이 바닷속에서 고래상어와 같이 헤엄치고 있다. 과학자들은 1950년대 핵실험 당시 나온 방사성 탄소14 동위원소를 이용해 고래상어의 나이테가 생겨난 정확한 나이를 알아냈다. ②고래상어의 척추골에 있는 나이테. 위는 18개, 아래는 50개다.

고래상어는 상어류이지만 이름대로 덩치가 고래만 하다. 몸길이 18m에 무게는 15~20t에 이른다. 사람과 같이 잠수해도 될 만큼 유순해 생태관광자원으로도 인기가 높다. 덩치 큰 동물들이 다 그렇듯 고래상어 역시 최근 개체 수가 급감하면서 멸종 위기에 내몰렸다. 하지만 고래상어를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연구가 진행됐지만, 나이나 수명 등 가장 기본적인 정보가 확보되지 않았다.

뼈가 단단한 경골어류는 작은 멸치에서부터 몸집이 큰 대구에 이르기까지 모두 머리의 내이(內耳)에 들어 있는 돌인 이석(耳石)으로 나이를 알아낸다. 이석은 물고기 몸 안의 분비물에 의해 형성된 딱딱한 석회질의 돌로, 물고기의 평형감각을 유지하게 한다. 여기에 나무처럼 해마다 하나씩 나이테가 생긴다. 반면 상어는 연골어류여서 이석이 없다. 대신 척추골에 있는 나이테로 나이를 가늠한다. 하지만 척추골의 나이테는 1년에 하나씩 생기기도 하고 6개월에 하나씩 늘기도 하는 등 들쭉날쭉하다.

연구진은 고래상어 척추골의 나이테가 언제 생겼는지 핵실험의 유산으로 확인했다. 바로 방사성 탄소 14 동위원소이다. 연구진은 파키스탄에서 보관하던 고래상어의 척추골에서 이 동위원소의 비율을 분석해 나이테가 해마다 하나씩 생겨 나이가 50세임을 알아냈다. 고래상어 개체의 나이를 정확히 알아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자연에는 같은 탄소 원자이지만 원자량이 12, 13, 14로 다른 동위원소들이 있다. 자연에 있는 탄소는 12(98.89%)와 13(1.1%)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14는 전체 탄소의 1조분의 1만 존재한다. 탄소 14는 다른 동위원소와 달리 방사선을 낸다. 원래 대기 중의 질소가 우주에서 날아온 고에너지 입자와 부딪혀 생겨났기 때문이다. 생명체가 죽으면 탄소 12, 13은 생전대로 있지만 14는 시간이 지나면서 방사선을 방출하고 다시 질소가 된다. 과학자들은 화석이나 사체에서 탄소 14 동위원소의 상대적 비율을 분석해 사후 얼마나 지났는지 알아낸다. 바로 탄소 연대측정법이다.

문제는 1945년부터 1968년 핵확산방지조약(NPT)까지 강대국들이 앞다퉈 공중에서 핵실험을 진행한 것이다. 핵폭발이 일어나면서 발생한 중성자가 질소와 반응해 탄소 14로 바뀌었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 박규준 박사는 "1950년대 핵실험으로 대기 중의 탄소 14 비율이 배로 늘었다"며 "핵실험 시작부터 금지될 때까지 시기는 다른 기준의 탄소 동위원소 비율을 연대 기준으로 삼는다"고 말했다. 이 시기 생명체에는 이전과 달리 탄소 14가 훨씬 많이 축적되기 때문이다.

가짜 위스키, 가짜 그림 판정에도 활용

핵실험으로 급증한 탄소 14는 반대로 나이를 속인 가짜들도 가려낼 수 있다. 지난해 6월 스위스 취리히 연방공대 연구진은 국제학술지 '미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미국 유명 화가 사라 혼의 19세기 작품이 위조됐음을 알아냈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그림이 그려진 바탕 캔버스와 그 위의 물감을 극미량 채취했다. 그리고 탄소 동위원소 비율을 따졌다. 그랬더니 캔버스는 19세기에 제작됐지만, 물감 속 기름은 1958~1961년이나 1983~1989년 사이 수확한 식물에서 나온 것들로 확인됐다. 캔버스보다 물감의 탄소 14가 훨씬 많아 핵실험 시대 이후 만들어졌다고 밝혀진 것이다. 나중에 위조범은 재판에서 1985년에 가짜 그림을 그렸다고 증언했다.

미국 작가 사라 혼의 그림에는 ‘사라 혼, 1866년 5월 5일’이라는 서명이 있으나 나중에 1985년 그린 위작으로 판명됐다. 스위스 연구진은 그림 왼쪽 맨 위 집(왼쪽 사진 파란색 네모)에서 채취한 물감(오른쪽 삼각형 부분)의 방사성 탄소14 동위원소량을 확인해 1950년대 이후 그린 위작임을 밝혀냈다.

그림에는 '1866년 5월 5일'이라는 글이 남아 있었다. 위조범은 위조 여부를 알지 못하도록 그림에 남긴 연대와 같은 시대의 캔버스를 구하고, 그림물감도 일부러 긁어내 오래된 것처럼 위장했다. 하지만 탄소 동위원소만큼은 바꾸지 못해 덜미가 잡힌 것이다. 2009년 영국 옥스퍼드대 연구진은 같은 방법으로 1856년산 2만 파운드짜리 위스키가 사실은 1950년대 산임을 밝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