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 있는 병실이 별로 없는데 또 중환자들이 입원한다니 막막하죠."

국책은행인 산업은행 임직원들은 최근 코로나발(發) 경제 위기 진행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경영난을 겪는 기업들이 잇따라 정부와 산은을 상대로 자금 지원을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은은 IMF 외환위기나 글로벌 금융 위기 등 위기 때마다 일시적으로 부실에 빠진 기업들에 대한 '재활 병동' 역할을 해왔다.

문제는 치료를 담당하는 산은도 좋은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시아나항공처럼 재활 치료를 끝내고 퇴원시키려던 기업이 코로나 사태로 다시 앓아누운 데다, 1조원의 긴급 수혈을 받은 두산중공업처럼 새로운 환자까지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계에서는 "부실 기업 치료하다가 우리(산은)까지 부실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또 쌍용차의 대주주 마힌드라가 2300억원 자금 지원 약속을 철회하면서 산은의 구조 조정 제1원칙인 '대주주 희생'도 깨질 위험에 처했다.

◇부실기업 50여 곳 남았는데 중환자 쇄도

산은이 치료하고 있던 구조 조정 기업은 2019년 말 58개에 달한다. 5년 전에 비하면 절반 가까이 줄긴 했지만, 코로나 사태로 환자가 늘어날 것에 대비하면 부담스러운 규모다.

현대산업개발 컨소시엄이 사기로 했던 아시아나항공은 산은의 새로운 골칫거리가 됐다. 아시아나가 코로나 직격탄을 맞아 실적과 주가가 곤두박질치자 계약금까지 냈던 현대산업개발과 미래에셋대우는 슬며시 발을 빼려는 모양새다. 현대중공업에 넘기려던 대우조선해양도 EU 경쟁 당국이 코로나로 인해 기업결합심사 업무를 일시 중단하면서 매각이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멀쩡했거나 통원 치료를 하던 기업들도 갑자기 병세가 악화됐다며 산은을 찾아오고 있다. 국내 5위 해운사 흥아해운은 코로나 사태로 물동량이 줄면서 돈을 갚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자 지난 3월 초 산업은행에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워크아웃은 채무상환 유예 등을 요청하며 경영권 일부 또는 전부를 채권단에 넘기는 기업 구조 조정 방식이다.

3월 말엔 국내 굴지 대기업 중 한 곳인 두산중공업이 산은에 손을 벌렸다. 산은은 수출입은행과 함께 1조원 자금 지원을 해주면서 두산중공업에 자구안을 요청한 상태다. 자구안이 제출되면 산은은 적정성을 따져 자율협약(채권단과 기업 간 협의를 통한 자율 구조 조정)이나 워크아웃 단계로 넘길지 여부 등을 결정하게 된다. 이 외에도 코로나 사태의 직격탄을 맞은 저비용항공사(LCC) 등 항공사들에 대해서도 산은은 무담보대출 방식 등으로 자금 지원을 해주고 있다.

산은이 어느 정도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는 미지수다. 지난해 말 기준 산은의 부실채권비율(고정이하여신비율)은 2.67%로 국내 모든 은행 가운데 가장 높기 때문이다. 시중은행(0.41%)은 물론, 수출입은행(1.79%)이나 기업은행(1.28%) 등 다른 국책은행보다도 높다.

◇정부는 무책임, 구조조정 원칙도 흔들

최근 산은을 당혹스럽게 한 곳은 쌍용자동차다. 쌍용차 대주주인 마힌드라가 당초 약속했던 2300억원 투자 계획을 철회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산은이 쌍용차 지원에 나설 경우 '대주주가 희생한 만큼 지원해준다'는 그동안의 구조 조정 원칙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결과가 된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경기 불황 장기화 가능성이 큰 지금 시점에 과거 조선산업처럼 밑도 끝도 없이 자금을 계속 지원할 경우 구조 조정도 안 되고 산업도 망가진다"며 "원칙과 기준을 명확하게 세워 과감히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말했다.

금융권에서는 "모피아(재무 관료)는 다 어디 갔나" "정부가 무책임하다"라는 불만이 나오고 있다. 정부가 나서 구조 조정을 진두지휘하지 않고, 산은과 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 등만 떠민다는 것이다. 또 정부 각 부처 간에 의견 조율이 안 되는 것도 산은의 발목을 잡고 있다.

한 국책은행 관계자는 "과거엔 금융 당국이 구조 조정 기준과 원칙을 세워줘 속도감 있게 업무를 처리하기 수월했는데 이번엔 누구도 책임지려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