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윤희 문화부 차장

오랜만에 재밌는 일본 드라마 한 편을 발견했다. 이시하라 사토미 주연의 '언내추럴(アンナチュラル)'. 부자연스러운 죽음을 조사하는 도쿄의 법의학 연구소를 배경으로, 시신을 부검해 진실을 파헤치는 법의학자들의 활약이 펼쳐진다. 매회 다른 에피소드가 빠른 속도로 전개돼 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정주행했다. 2018년 드라마라는데 왜 이제야 봤을까. 강제적 '주말 집콕'이 가져온 뜻밖의 소득이다.

공교롭게도 첫 회 에피소드가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다. 중동 출장을 다녀온 젊은 남자가 돌연사한다. 사인(死因)은 허혈성 심장 질환.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부모가 부검을 의뢰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출장 직후 그가 만났다는 협력사 여직원도 이튿날 사망했다. 우연일까. 독극물 조사까지 벌이던 연구소는 결국 메르스가 원인임을 밝혀낸다.

남자가 최초 확진자이자 수퍼 전파자로 몰리면서 여론의 비난이 쏟아진다. "당신 아들이 여자를 죽였다고!" 남자의 부모는 허리 숙여 사죄하고, 아버지가 울먹이며 말한다. "아들이 무리하게 귀국한 건 회사를 쉬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어릴 때부터 저는 감기 정도로 학교를 쉬지 말고, 인내심이 강한 남자가 되라고 키웠습니다. 우리가 틀렸을까요?"

일본 드라마 '언내추럴' 장면.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의 브리핑이 떠올랐다. 지난달 16일 코로나 바이러스 장기전에 대비한 생활 수칙을 소개하면서 그는 "'아파도 나온다'는 문화를 '아프면 쉰다'로 바꿀 수 있도록 근무 형태나 여건을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파도 출근한다는 신념은 한국 사회에서 성실의 지표였지만, 감염병이 도는 상황에선 공동체에 위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근면과 성실로 기적을 일군 나라의 국민답게 우리는 '가서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학교와 직장에 나간다. 우등상은 못 타도 개근상은 받아야 성실한 학생이었고, 부서질 듯 아파도 '출근 도장'을 찍어야 책임감 있는 직원으로 인정받았다. 직장인 97%가 아파도 참고 일한다고 답한 설문 결과도 있었다(잡코리아 조사). 응답자 절반이 '성실하게 책임을 다하는 조직 문화를 위해'라고 답했다.

미국 뉴욕에 연수 갔던 한 선배는 감기 걸린 딸을 학교에 보냈다가 선생님한테서 질책성 전화를 받은 경험을 들려줬다. "아이가 열나고 기침을 심하게 하니 집으로 데려가라"는 것이다. 미국에선 감기처럼 옮기기 쉬운 병에 걸린 아이가 학교에 가면 민폐로 여긴다. 그런 미국도 직장인의 경우는 다른 모양이다. 한 법률 자문 회사는 미국 기업 절반이 아픈 걸 참고 출근하는 직원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는 조사 결과를 냈다. 프레젠티즘(Presenteeism· 아파도 참고 출근하는 것)이 앱센티즘(Absenteeism ·아프다고 결근하는 것)보다 손실이 크다는 것. 무리한 출근보다 마음 놓고 쉬게 하는 게 양질의 생산성으로 이어진다는 얘기다.

'악바리 타자'로 유명했던 프로야구 이정훈 선수는 신인왕으로 출발해 타격왕에 수차례 올랐지만 전성기가 짧았다. '쓰러져도 그라운드에서 쓰러지겠다'는 좌우명이 문제였다. 다치면 충분히 쉬어야 하는데 아픈 걸 숨기고 경기에 나섰다가 더 큰 부상을 얻었다. 구성원의 건강이 그저 개인의 몫이 아니라 서로의 안녕과 일의 지속성으로 이어진다는 걸 체감하는 시대. 코로나가 우리 사회의 오랜 미덕까지 바꾸는 중이다.

드라마는 의외의 반전으로 끝났다. 남자가 중동에서 감염된 최초 확진자가 아니라, 도쿄 병원에서 누출된 바이러스가 원인이었다. 그도 피해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