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말 '구름빵' 저작권 송사로 마음고생을 많이 했는데, 한국에서 다같이 응원해주고 길을 닦아주셔서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아직도 실감이 안 나요. 너무 드라마틱해서…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것 같아요."
한국인 최초로 세계 최대 아동문학상인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상(ALMA)' 올해의 수상자로 결정된 '구름빵' 작가 백희나(49)는 31일(현지 시각) 밤 태국 방콕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며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믿기지 않는다"는 수상 소감을 거듭 밝혔다.

'2020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상' 수상자로 백희나씨가 선정됐음을 알리는 홈페이지 화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상은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 ‘에밀은 사고뭉치’ 등으로 세계 아동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동화작가 린드그렌(1907~2002)을 추모하기 위해 2002년 스웨덴 정부가 제정한 상으로, 상금이 500만 스웨덴크로나(약 6억465만원)에 달한다. 2003년 첫 회 수상자가 오스트리아의 동화작가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와 미국의 그림책 작가 모리스 센닥이고, 일본의 유명 그림책 작가 아라이 료지는 2005년 수상했다. 지난해에는 벨기에의 대표 그림책 작가 바르트 무야르트가 받았다.

이화여대 교육공학과 출신인 백씨는 1997년 미국 유학을 떠나 캘리포니아 예술학교(Cal Arts)에서 캐릭터 애니메이션을 공부했다. 유학 전 잠깐 출판 관련 아르바이트를 했던 것이 인연이 돼 2004년 데뷔작 ‘구름빵’(한솔수북)을 냈다.

비 오는 날 구름 반죽으로 만든 빵을 먹은 아이들이 두둥실 하늘로 떠올라 아침을 거르고 출근하는 아빠에게 구름빵을 가져다준다는 이야기는 현재까지 약 45만부가 팔렸다. 이 작품은 백씨에게 2005년 볼로냐 국제 아동도서전에서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영예를 안겨줬다. 2011년 영문판이 나왔고, 프랑스·대만·일본·중국·독일·노르웨이 등에 수출됐다. 어린이 뮤지컬과 TV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됐다. ‘달 샤베트’와 ‘장수탕 선녀님’ ‘알사탕’ ‘팥죽할멈과 호랑이’ ‘북풍을 찾아간 소년’ ‘분홍줄’ 등 그의 작품은 출간될 때마다 어김없이 올해의 책으로 언급되며, 아동문학계에 돌풍을 일으켰다.

―축하한다. 세계 최대 아동문학상을 수상한 소감이 어떤가.
"아직도 실감이 안 난다. 주최측으로부터 전화로 수상 소식을 전해 듣고 기뻐서 어버버하게 대답한 목소리가 유튜브 생중계를 타고 전세계로 나갈 줄 몰랐다."

―소식을 들은 순간 머리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장면은?
"사실 태국에서 머물고 있어 전화도 끊기고, 갑자기 들은 소식이라…. '구름빵' 재판으로 워낙 진이 빠져 있어서 후보에 오른 것도 몰랐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상 홈페이지에 오른 백희나 작품 '장수탕 선녀님'의 한 장면.
백희나 그림책 '달 샤베트'의 한 장면.

국내 그림책으로는 드물게 ‘구름빵’은 국제적 명성을 얻었으나 그는 출판사와 저작권 양도계약을 해서 계약금 850만원과 인센티브 1000만원을 받는 데 그쳤다. 백씨는 출판사 등을 상대로 저작권 소송을 냈으나 1·2심 모두 패소했다. 지난 1월 서울고법 민사4부(재판장 홍승면)는 백씨가 한솔교육과 한솔수북, 강원정보문화진흥원, 디피에스 등을 상대로 낸 저작권 침해 금지 소송에서 1심과 같이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백씨와 한솔교육이 ‘구름빵’을 출간하기로 하며 한 계약에는 ‘저작인격권을 제외한 저작재산권 등 일체의 권리를 한솔교육에 양도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재판부는 “이 조항은 계약을 체결한 2003년 당시 백씨가 신인 작가였던 점을 고려하면 상업적 성공 가능성에 대한 위험을 적절히 분담하려는 측면도 있다”며 “따라서 백씨에게 부당하게 불리한 조항이라고 볼 수 없으므로, 불공정한 법률행위라 무효라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책의 저작권과 별도로 동화 속 인물에 대한 ‘캐릭터 저작권’이 인정돼야 한다는 주장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스웨덴 최대 일간지 '다겐스 니히테'에 실린 백희나 작가의 2020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상 수상 소식.

―판결이 그렇게 나서 속상했겠다.
"속상하다는 표현 그 이상이다. 물론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싸움이란 거 알고 있었고. 지더라도 조금이라도 신인 작가들, 힘 없는 작가들의 처지가 개선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악' 소리라도 내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싸움이었지만 판결문과 대한출판문화협회 등에서 보낸 의견서를 보니 한국 작가의 권리가 정말 미약하고 보잘 것 없는 것 같아서 진짜 괴로웠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와중에 린드그렌 상을 받아)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너무 드라마틱한…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다."

―누구에게 제일 먼저 수상소식을 전했나?
"정식 발표가 나기 전까지는 비밀 엄수라고 해서 급하게 출판사 담당 편집자님께 톡으로 (수상자 발표) 생중계 링크를 보라고 연락 드리고, 가족들에겐 이유도 말 못하고 링크를 보냈다. 내가 딸 하나, 아들 하나 엄마인데 가족들이 정말 좋아한다. 딸내미는 눈물이 글썽해서 축하한다고 하고, 아들은… (시상식이 열리는) 스웨덴으로 가게 되면 소시지 하나 사다 달라더라(웃음).

2016년 4월 11일 초등2 범준, 중1 홍비의 엄마인 그림책 작가 백희나. 자신이 신(神)으로 군림했던 이촌동 작업실에서, 이번에는 거꾸로 피사체가 됐다. 신작‘이상한 엄마’의 선녀와 엄마 등 자신이 직접 만든 캐릭터를 품에 안고서, 마치 촬영 현장의 한 장면처럼.

―상금(6억여원)이 어마어마하다.
"사실 그동안 여정이 시작부터 험난했던지라 기쁜 일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게 익숙지 않다. 상도 믿기지 않는데, 상금을 받아 쓸 계획은 더더욱…. 좋은 일에 써야지."

백희나 최신작 '나는 개다'의 한 장면.

―'구름빵'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0편 넘는 작품을 썼다.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내리사랑인지 언제나 최근 작품에 가장 애착이 간다. '나는 개다'(2019)가 가장 신간. 인간의 기술과 과학이 발전하면서 많은 문제를 극복했지만, 그 극복에 익숙해져서인지 예기치 못한 운명과도 같은 상황을 받아들이는 게 힘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주어진 상황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개의 모습을 보며 숙연해졌다. 아직 어린 나이에 가족과 억지 이별을 하고, 낯선 새 가족을 만나고, 그 가족이 어떤 성품, 어떤 모습을 가졌든 간에 무조건적인 사랑과 신의를 준다. 멀리 떨어져 기억도 나지 않는 가족들을 향해 하울링으로 대답을 해준다. 그런 모습이 특히 요즘 같이 격리돼 있는 상황에서 더 공감이 갔다. 며칠 전 잠들기 전에 '나는 개다'를 다시 읽어봤는데 굉장히 좋았다. 베란다에서 주인공 개가 멀리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하울링에 응답해주는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처럼 떨어져 있지만 공존하고 있고, 서로에게 기대고 응답해주는 모습이 우리 모습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불안하고, 힘들지만, 함께여서 견뎌나가는 모습으로 느껴졌다."

―좌우명도?
"'내 페이스대로 꾸준히 걸어가자'이다."

―린드그렌과의 추억은?
"어릴 때 내 별명이 '삐삐'였다. 외모가 닮아서. 나도 삐삐처럼 살고 싶었다."

말괄량이 삐삐.

2020년은 린드그렌의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이 출간된 지 75주년 되는 해다. 언제나 좌우 색깔이 다른 양말을 신고 있는 삐삐의 이야기는 영화, 뮤지컬, 애니메이션 등 각종 콘텐츠로 가공돼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스웨덴과 린드그렌 재단도 세계에서 가장 사랑 받는 동화 중 하나인 이 작품에 의미를 두고 있다. 출판사 시공주니어는 그래픽노블 ‘세상에서 가장 힘센 소녀 삐삐’를 선보였고, EBS는 봄 개편으로 추억의 드라마 ‘말괄량이 삐삐’를 매주 방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