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나, 당신 뭐하는 분인가요?"

미국 뉴욕 맨해튼 거리를 걷고 있던 열여섯 살 박진이의 걸음을 멈추게 한 목소리다. 175㎝ 큰 키에 늘씬한 팔과 다리, 쌍꺼풀 없는 눈매에 앳돼 보이는 동양적 얼굴 선을 지닌 박진이는 서양의 톱 모델들이 활보하는 뉴욕에서도 눈에 띄는 외모였다. 친구들과 식당에 가거나, 트레이닝복을 입고 거리를 누빌 때도 그를 캐스팅하려는 이들을 종종 마주했다. 1년 뒤 세계적 모델 매니지먼트사인 포드(Ford)와의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패션지 그라치아의 멕시코판 3월호 표지를 장식한 박진이가 디올 향수와 독점 촬영한 커버 스토리 화보.

"서너 살 때부터, 의류학을 전공하신 엄마가 옷을 예쁘게 입혀주셔도 제 고집대로 신발이며 옷이며 맞춰 입고 나갔대요, 하하! 어릴 때부터 모델 같다는 얘기를 줄곧 들어서인지, 제안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어요." 하지만 꿈과 현실은 딴판이었다. "화려하기만 할 것 같은, 흔한 편견이 제게도 있었던 거죠. 막상 현장에 발을 내디뎌보니 그 어떤 직업보다 자기희생과 절제가 필요하고, 현실과 환상 속에 균형감을 찾아야 할 강한 정신력으로 중무장해야만 했어요."

'앨리스 앤드 올리비아' '코셰' 등 뉴욕 패션위크 무대를 비롯해, 최근 유명 패션지 그라치아의 멕시코판 표지 모델을 거머쥐며 패션계 떠오르는 스타로 자리매김한 한국계 미국인 모델 박진이(22)는 전화 인터뷰에서 "'드디어 꿈꾸던 표지 모델이다!'라고 좋아할 새도 없었다"며 웃었다. "많은 모델 일이 예정도 없이 갑작스레 몰려들곤 하죠. 매일이 긴장이고, 절대 늘어져 있으면 안 돼요. 그라치아 표지 촬영 역시 전날 밤 에이전시에서 갑자기 이메일이 왔어요."

사진은 모델 프로필 촬영. 박진이는 "세계적인 팀과 커버 촬영하니 2월 뉴욕 날씨가 추운 지도 몰랐다"며 "꿈인지 생시인지 제 볼좀 꼬집어 주시겠어요?"라며 웃었다.

현재 뉴욕대 자유전공학부(School of Gallatin)에서 '패션 경영과 지속 가능성'을 공부하고 있다. 뉴욕을 대표하는 모델 겸 배우 에이전시인 윌레미나와도 새로 계약했다. "패션을 선도하는 인재가 수만명 모이는 곳이다 보니 트렌드를 빨리 익힐 수 있었고, 잘 거절당하는 법에 대해서도 배우게 됐다"고 했다. "180㎝ 넘는 톱 모델들 사이에선 작은 편이고, 엉덩이 굴곡도 두드러진 편이라 단점이 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남의 것을 부러워할 게 아니라 내 장점을 더 발휘할 수 있도록 전체적인 몸의 라인, 눈빛 같은 걸 더욱 계발하게 됐지요. 요즘은 자기만의 색깔, 스토리텔링이 강한 모델을 선호하는 시대니까요." 이후 로레알, 맥 등 화장품 광고까지 찍었다.

그에게 아낌없는 조언을 해준 건 테니스 여제(女帝)이자 2019년 가을 뉴욕에서 패션 브랜드 '세리나'를 론칭한 세리나 윌리엄스다. "데뷔 쇼 무대에서 캐스팅부터 의상까지 꼼꼼하게 점검하더군요. 이름만 내걸던 여느 스타들과는 달랐어요. 리허설 때 제가 긴장해 있자 '잘할 거고 앞으로 더 잘할 것'이라고 격려하더니 쇼가 끝난 뒤엔 '기대를 뛰어넘었다'며 칭찬해줬죠." 박진이 역시 고등학생 때부터 학교 수영 대표 선수였고 복싱, 요가 등 운동광인 데다 패션 사업가를 목표로 삼고 있어서 세리나의 조언이 더욱 다가왔다.

"내년에 학교를 졸업하면 더 나은 환경을 위한 '지속 가능 패션' 회사를 설립해 보려고요. 이제 패션은 의복을 뛰어넘어 사회의 긍정적 변화에 어떻게 공헌할 수 있을지를 시대정신으로 삼아야 하거든요. 섬유회사를 하셨던 아버지가 항상 강조한 부분이기도 하고요. 멈추지 않고 계속 도전해볼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