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삼희 선임논설위원

작년 2월 ‘전염병이 기후까지 바꾼다’는 칼럼을 썼다. 그즈음 발표된 영국 과학자들 논문을 소개한 것이었다. 유럽인들이 서기 1500년대에 퍼뜨린 천연두 등 전염병으로 미주 대륙 인구 90%가 사멸했다. 그로 인해 방치된 농경지에 숲이 들어차 대기 중 이산화탄소가 최대 10ppm까지 떨어졌다는 내용이다. 지구의 수은주도 떨어졌다. 원래 이 주장은 미국 기후학자 윌리엄 러디먼이 2003년 내놓은 것이다. 작년 논문은 관련 증거를 광범위하게 수집해 제시한 것이다. 러디먼 교수는 서기 200~600년, 1200~1400년에도 페스트 등으로 세계 인구가 12~18% 감소했다고 계산했다. 인구 자체가 준 데다 생존자들도 감염 공포로 마을을 벗어나 흩어지면서 농경지가 숲으로 변했다. 러디먼 교수는 남극 빙하의 기포(氣泡) 분석을 통해 인구의 거대 사멸(Great Dying) 시기마다 이산화탄소가 5~10ppm 떨어진 사실을 밝혔다.

세계가 전대미문의 코로나 공포에 휩싸였다. 이걸 겪으면서 글로벌 세상이 얼마나 위태로운 균형 속에서 버티고 있는 것인가도 알게 됐다. 마드리드, 뉴욕에선 의료진이 쓰레기봉투를 테이프로 이어 붙인 방호복을 입었다. 파리, 뉴욕은 영안실이 모자라 냉동 트럭에 시신을 안치했다. 뉴욕타임스는 인공호흡기 제조에 14국의 1500개 부품이 필요하다는 절망적 소식을 보도했다. 자동차 회사, 진공청소기 회사가 호흡기 제작에 나섰지만 빨라도 몇 주 걸린다. 그 몇 주가 다시 수십만, 수백만의 확진자를 만들 것이다.

절체절명 위기에 각국 정부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을 모색하고 있다. 코로나 사태 초기 대만은 마스크 수출부터 막았다. 독일이 3월 초 방역 장비 수출을 금지하자 스위스, 오스트리아, 스페인이 거칠게 항의했다. 트럼프는 독일 바이오 기업 CEO를 백악관에 불러 거액 투자를 제시하고는 백신이 개발되면 미국인 먼저 쓸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제시액이 10억달러라는 보도가 나왔다. 메르켈은 단호하게 "안 된다"고 했다. 독일 장관은 "국가 책무엔 우리 의약품을 지키는 것도 포함된다"고 했다. 미국, 중국 사이에선 "중국 바이러스" "미군이 중국에 바이러스 유포했을 가능성"이라는 거친 말들이 오갔다.

위기의 시기엔 평시의 도덕, 윤리, 질서가 먹히지 않는다. 미국 스탠퍼드대 엘리자베스 해들리 교수가 2012년 네팔의 히말라야 생태 조사 도중 겪은 일이다. 일행 넷이 해발 3000m 고산지대의 원주민 집에서 하루 묵게 됐다. 계단식 농경지 옆, 집이라곤 딱 두 채뿐인 곳이다. 원주민들은 친절했는데, 저녁 무렵 날카로운 비명이 들리더니 두 집의 어른, 아이가 모조리 뛰쳐나와 엉겨붙었다. 칼, 작대기를 휘두르고 할퀴고 머리를 끌어당기는 패싸움이 벌어졌다. 수습 후 해들리 교수팀이 머리, 얼굴 찢긴 원주민들 상처를 꿰매줘야 했다. 싸움은 한 집 아이가 이웃집 장작더미를 훔치다 들키면서 벌어졌다. 땔감 모으는 건 아이들 일이다. 나무의 손 닿는 높이까지 가지들을 솎아내 땔감으로 써왔다. 숲의 아래 가지들이 고갈되면서 점점 멀리까지 내려가야 하는 고된 작업이 됐다. 고작 나무 한 더미가 첩첩산중 딱 두 집만 사는 이웃 사이를 죽자 살자 사생결단으로 밀어 넣었다. 물자가 부족하면 인간 심성은 그렇게 험악해질 수 있다.

국가는 개인보다도 훨씬 이기적인 행동 주체다. 국가 사이는 궁극적으론 힘과 계산으로 작동한다. 2003년 미국 포천지가 '펜타곤 리포트'라는 국방부의 미래 예측 보고서를 특종 보도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기후 급변으로 멕시코 만류 흐름이 끊기면서 2020년 유럽이 시베리아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보고서는 방글라데시, 카리브 등의 아사(餓死) 사태를 내다봤다. 대량 난민으로 세계는 무정부 상태가 된다. 보고서는 식량, 물, 에너지 확보를 놓고 국가 간 일상적 전쟁의 시대로 들어설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핵전쟁도 거론됐다.

펜타곤 리포트 예측은 들어맞지 않았다. 그러나 전염병이든 기후 급변이든 또는 다른 어떤 요인이든, 인간 세계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위기가 덮칠 수 있다는 걸 코로나 사태가 깨우쳐 주고 있다. 만일 기후 붕괴로 세계 작물 수확량이 3년쯤 내리 20~30% 감소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한국 같은 식량 수입국이 손 놓고 있다가 당하면 코로나의 10배, 100배 지옥 같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건 아닐까. 코로나 이후는 바뀔 수밖에 없다. 평소 관점에선 불필요해 보이는 곳에도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어 위기 예방력, 위기 대응력을 키워야 할 것이다. 우선순위를 놓고 많은 고민과 토론이 있을 수밖에 없다. 평온한 일상이 그렇게 소중한 것인 줄을 뼈저리게 느끼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