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오전 '서해 수호의 날' 기념식이 열린 국립대전현충원에서 현충탑에 분향하려는 문재인 대통령 옆으로 흰 우의를 입은 백발의 할머니가 불쑥 다가섰다. 10년 전인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폭침으로 목숨을 잃은 고(故) 민평기 상사의 어머니 윤청자(77)씨였다. 윤씨는 문 대통령에게 "대통령님, 이게(천안한 폭침) 북한 소행인가, 누구 소행인가 말씀 좀 해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문 대통령이 "북한 소행이라는 게 정부의 입장 아닙니까"라고 했다.

이에 윤씨는 "여태 북한 짓이라고 진실로 해본 일이 없어요. 이 늙은이 한 좀 풀어주세요"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정부 공식 입장에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국방부는 작년 3월 "북한의 도발로 본다"고 밝혔지만, 문 대통령이 취임 후 '북한 소행'이라고 직접 밝힌 것은 처음이다. 문 대통령은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시절인 2015년 3월에 "북한 잠수정이 천안함을 타격했다"고 했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27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서해수호의 날 행사에 참석해 분향하려는 순간 백발의 할머니가 막아서며 질문을 하고 있다. 이 할머니는 천안함 용사 고(故) 민평기 상사의 어머니 윤청자씨다. 윤씨는 “이게 북한 소행인가, 누구 소행인가 말씀해 주세요”라고 물었고 문 대통령은 “북한 소행이라는 게 정부의 입장 아닙니까”라고 했다.

윤씨는 이날 행사 뒤 본지와 통화에서 "청와대가 한 번도 '북한 소행'이라고 명확히 밝힌 적이 없는데, 대통령께 그 한을 좀 풀어달라고 했던 것"이라며 "대통령이 북한이 저지른 게 맞는다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세월호 사고는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 늘 함께 추모해주는데, 천안함 유족은 쓸쓸했다"고 했다. 이어 "너무 한스럽고 울컥해서 '살아생전 마지막 기회겠다'라는 생각에 나가게 됐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제2연평해전과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으로 희생된 55용사를 기리는 '서해 수호의 날' 기념식에 취임 후 처음으로 참석했다.

윤씨는 2010년 유족 보상금 등으로 받은 1억898만원을 정부에 성금으로 기부했다. 해군은 이 성금 등으로 이듬해 초계함 9척에 '3·26 기관총'으로 이름 붙인 K-6 기관총 18정을 장착했다.

老母의 성금으로 장착한 기관총 - 천안함 폭침 1년 뒤인 지난 2011년 3월 윤씨가 해군에 기증한 K-6 기관총.

윤청자씨는 27일 "지난 10년간 '천안함 사건이 북한 소행인지 좌초인지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때문에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통령도 북한 소행이라고 속 시원히 밝힌 적 없지 않으냐"고 했다. 윤씨는 2010년 '천안함 조사 결과에 의혹이 있다'는 서한을 유엔 안보리에 보낸 참여연대를 찾아갔다.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하루하루 사는 게 지옥인데 내 가슴에 못 좀 박지 말라. 그럼 누가 죽였는지 말 좀 해보라"며 항의했었다.

윤씨는 이날 "2018년 김영철이 방한할 때는 너무 한스럽고 화가 나 청와대 앞에서 시위도 했다"고 말했다.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은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폐회식 참석차 방한했다. 윤씨는 "김영철만 보면 요즘도 사지가 벌벌 떨린다. 유족들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김영철이나 김정은은 불러선 안 되는 것"이라며 "저놈들이 또 우리 아이들 생명 앗아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연평도 포격으로 2명이 더 갔다"고 했다.

윤씨는 5남매 중 막내아들인 민 상사의 시신을 확인한 10년 전 그날을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윤씨는 "얼굴이 시퍼렇고 몸이 얼음장처럼 찼다. 얼마나 추웠겠느냐"고 했다.

윤씨는 2010년 6월 이명박 대통령의 청와대 초청을 받고 유족 보상금으로 받은 1억원을 봉투에 넣어 청와대에 전달했다. 동봉한 편지엔 "나라를 지키는 데 써달라"고 했다. 국민 성금으로 받은 898만8000원도 해군에 전달했다. 해군은 윤씨의 성금을 포함해 총 5억원으로 K-6 기관총 18정을 구입, 초계함 9척에 2정씩 장착했다. 천안함 폭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3·26 기관총'으로 이름 지었다. 해군은 '민평기 기관총'으로 명명할 계획이었지만, 윤씨가 한사코 사양했다. 2011년 3월 '3·26 기관총' 기증식에서 K-6 기관총을 부여잡고 오열했던 윤씨는 이듬해 정부에서 국민 추천 '국민포장'을 받았다.

취임후 첫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 참석한 문대통령 - 문재인 대통령이 27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 참석해 고(故) 한주호 준위의 묘비를 어루만지며 참배하고 있다. 한주호 준위는 천안함 폭침 사건 당시 실종자 수색 작업을 하다 목숨을 잃었다. 문 대통령이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 참석한 것은 취임 후 처음이다.

문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 참석한 이날 '서해 수호의 날' 기념식에는 윤씨 등 천안한 폭침 전사자 유가족, 제2연평해전과 연평도 포격 사건 전사자 유가족, 고(故) 한주호 준위 유가족 등 유가족 93명이 초청됐다. 문 대통령은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기념사에서 '남북 군사 합의'만 언급했을 뿐 '북한의 도발 책임'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10분간 이어진 기념사에서 '북한'이란 단어도 나오지 않았다. 다만 "가장 강한 안보가 평화며, 평화가 영웅들의 희생에 보답하는 길"이라며 "정부는 2018년 남북 간 '9·19 군사합의'로 서해 바다에서 적대적 군사행동을 중지했다"고 했다.

천안함과 관련해선 "46용사 유족회와 천안함 재단은 대구·경북에 마스크와 성금을 전달했다" "천안함 46용사 추모비가 세워진 곳에서 후배들이 우리 영토와 영해를 수호하고 있다"고만 했다. 제2연평해전에 관해선 2018년 국무회의에서 의결한 '전사자 보상 특별법 시행령'만 언급했다. 대신 '애국심'이란 단어를 11차례 반복했다. 문 대통령은 코로나 사태 등과 관련해 "국민의 기억 속에 애국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한 우리는 어떤 위기도 극복해낼 수 있다"며 "오늘 '서해 수호의 날'을 맞아 불굴의 영웅들을 기억하며 코로나19 극복의 의지를 더욱 굳게 다진다"고 했다. 고(故) 박성균 중사의 어머니는 문 대통령 앞에서 오열하며 "(희생 용사들의) 엄마들이 왜 다 안 온 줄 아느냐. 아파서 그렇다"고 했다. 천안함 생존자 예비역 전우회장 전준영(33)씨는 페이스북에 "천안함 10주기=코로나 행사, 서해 수호의 날=코로나 행사"라고 썼다.

미래통합당은 이날 문 대통령의 참석을 두고 "총선을 의식한 정략적 참석"이라며 "그래서 대통령 경호까지 뚫리는 초유의 일이 발생한 것 아니냐"고 비판했다. 청와대는 "윤 여사는 유족 대열 맨 앞쪽에 있어 제지하기 어려웠고, 고령의 유족을 함부로 제지하는 것도 기념식 취지와 맞지 않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