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균

개강이 연기돼 군산 고향 집에 있던 고영채(22)씨는 자신의 노트북 앞에 앉아 캔맥주를 마셨다. 그는 혼자 있었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노트북의 화면에 뜬 다섯 개의 네모 칸 안에 고씨와 친구 네 명의 얼굴이 각각 들어 있었다. 아직 서울에 올라오지 못했거나 코로나 사태 때문에 외출을 꺼리는 친구끼리 모여 화상 회의 설루션 '줌'(zoom)을 이용해 술자리를 가진 것. 이들은 화면을 통해 먹고 있던 과자, 치킨이나 새로 산 옷을 보여주고 근황을 주고받으며 30분 넘게 맥주 모임을 이어갔다. 고씨는 "학교 앞 치킨집에서 맥주를 마시는 것보단 덜 시끌벅적하지만, 대화 내용은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다"며 "평소에 하는 영통(영상통화)을 여러 명이 함께하는 것과 비슷해서 재밌고 편하다"고 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 액정 속 화상(畵像)이 일상(日常)이 되어가고 있다. 코로나가 만든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베이비붐·586·X·밀레니얼 세대보다 후배인 Z세대는 코로나 사태 전부터 이를 현실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개학 연기와 사회적 거리 두기는 이 세대의 사적(私的) 온라인 동영상 문화가 공적(公的) 영역까지 넘어가도록 만든 계기가 됐을 뿐이다. 수업도, 인간관계도, 취미도 모두 온라인 동영상으로 해결하기 시작한 이들은 주머(Zoomer)라고 불린다.

공부·파티·소개팅 모두 화상으로 해결

Z세대에 대한 정의는 분분하지만 대략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태어난 세대를 지칭한다. 중·고·대학생, 사회 초년생이 여기 속한다. 주머는 베이비붐 세대를 '부머'라고 부르는 것을 본떠 Z세대를 '주머'라고 부른 데서 나왔다. 이 단어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코로나 사태로 인해 전 세계 학교에서 줌을 이용해 수업을 하면서부터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17일 "십대들은 자신들이 Z세대라고 불리는 이유가 줌으로 모든 것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농담을 한다"며 "실제로 Z세대는 수업이나 친구를 만나는 것은 물론 파티와 소개팅도 다 줌을 통해서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2013년 출시된 줌의 정식 명칭은 '줌 비디오 커뮤니케이션스'. 창업자 에릭 위안(50)은 중국 산동과학기술대를 졸업한 뒤 미국 시스코에서 일하다가 2011년 줌을 창업했다. 포브스는 기업의 코로나 사태 때문에 화상회의에 주로 쓰인 줌의 유료 이용 고객(10명 이상의 사업체 혹은 단체)이 2016년 1만900명에서 올해 9만5100명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한다. 지난해 매출은 6억2270만달러로 2016년(6080만달러) 대비 열 배가 증가했다.

국내에서도 올해 들어 기업체 화상회의뿐만 아니라 학교와 학원의 온라인 강의를 할 때 줌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시스코의 웹엑스나 구글의 G스위트도 국내 대학들이 사용하는 화상회의 설루션이다. 유튜브나 아프리카TV 같은 동영상 플랫폼과 달리 화상 통화처럼 참여자 전원의 목소리와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줌의 경우, 100명이 한 번에 40분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휴대전화 접한 '포노 사피엔스'

주머의 또 다른 특징은 태어나면서 동시에 디지털 기기를 접했다는 것이다. 밀레니얼이 성장기에 휴대전화를 처음 접한 디지털 개척자였다면, 이들은 '디지털 네이티브(원주민)'다. '포노 사피언스(Phono Sapiens·스마트폰을 신체 일부처럼 자연스레 사용하는 인류)'라고도 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휴대전화의 동영상이나 사진으로 찍히고, 문자나 SNS로 그 소식이 알려졌다. 식당에 가면 부모가 태블릿이나 휴대전화를 쥐여줬고, 학교도 가기 전에 '쥬니버'(어린이용 네이버)를 이용했고, 유튜브도 어린 나이에 접했다. 대학내일20대연구소의 장지성 연구원은 "Z세대는 하루 평균 2시간 30분 이상 온라인 동영상을 시청하고 네 명 중 세 명이 1인 크리에이터 영상을 본다"며 "유튜브와 틱톡, 인스타그램의 영상은 이들의 일상 속에 녹아들어 있다"고 했다. 일상과 영상이 하나가 된 예로는 '브이로그'(vlog·비디오와 블로그의 합성어)도 있다. 공부하거나 밥을 먹는 등 자연스러운 일상을 영상으로 기록했다가 편집해서 유튜브에서 공유한다.

주머가 영상 콘텐츠에 익숙한 또 다른 이유에 대해 '포노 사피엔스'의 저자인 최재붕 교수(성균관대)는 이들이 어릴 때부터 게임에 익숙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한글이나 숫자를 배우는 온라인 교재는 게임처럼 이야기에 따라 과제를 해결하는 형식으로 만들어졌고, 초등학교 입학 전후로 대부분 모바일 게임을 시작한다. 최 교수는 "다른 세대는 Z세대가 글을 읽고 사유하는 능력이 떨어진다고 하지만, 이들의 디지털 학습 능력은 어느 세대보다도 탁월하다"며 "영상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높고 이를 통해 뭐든 배울 수 있다"고 했다. "Z세대 대학생들은 영상 강의를 통해 공부할 수 있는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데 이번 코로나 사태에선 대학과 교수진의 경험이 부족해서 이들의 기대치를 만족시키지 못했어요. 영상 강의를 시작하면서 세대 간 문화 격차가 굉장히 크다는 것을 새삼 느꼈죠."

주머들이 보고 싶거나 봐야 하는 영상은 너무 많다. 분량이 긴 것이나 되씹어 볼 만한 것보다 짧고 강렬한 것을 선호한다. IBM 글로벌비즈니스서비스(GBS)코리아의 이한규 상무에 따르면 Z세대가 동영상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약 8초. 이들이 주로 사용하는 인스타스토리나 틱톡 같은 앱의 동영상은 모두 15초를 넘어가지 않는다. 해외에서 많이 쓰는 스냅챗의 동영상은 10초다. 장지성 연구원은 "인스타스토리나 틱톡에서 낯선 사람을 15초 동안 보고 마치 친구가 된 듯 이모티콘이나 댓글을 보낸다. 아무나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대신, 그 관계는 휘발성이 강하다"고 했다.

자유·개성 강조하는 X세대가 부모

기성세대는 편의상 밀레니얼과 Z세대를 묶어 MZ세대라고 부른다. 모두 '요즘 것'으로 취급받고 있지만, 둘 사이엔 다른 부모 밑에서 자랐다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밀레니얼의 부모는 대부분 50대 이상이지만 Z세대의 부모는 X세대인 경우가 많다. 이한규 상무는 "X세대는 청년기에 디지털 세상을 접했기 때문에 디지털 전환에 더 열려 있다"며 "'서태지 세대'로서 자유로운 성향과 개성이 강했던 이들은 자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며 키웠다"고 했다.

주머의 부모는 X세대. 그래서 주머의 동영상 사용 양상은 다른 세대와 다르게 나타난다. 지난해 8월 한 달간 10대에서 50대 이상까지 SNS 사용 시간을 보면 모든 연령대에서 유튜브가 1위를 차지했다. 이 중 10대가 2500시간으로 가장 많고, 20대가 1882시간으로 그 뒤를 잇는다. 밀레니얼 세대가 집중된 30대는 1105시간으로 10대의 절반도 안 된다. 이들은 동영상을 많이 볼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한 표현도 적극적이다.

직장인 김모(44)씨는 지난해 초등학교 3학년짜리 딸이 유튜브에 채널을 개설하고 그림 그리는 자신을 찍어 올리겠다고 했을 때 이를 허락했다. 그는 "이미 반 학생 대부분이 자기만의 채널을 갖고 있었고, 아이가 그걸 통해 친구들과 소통하면서 자신의 특기를 잘 살릴 수 있길 바랐다"고 했다. 그는 딸의 채널에 '구독'과 '좋아요'를 누르고 주변에 홍보까지 했다.

경기도 광명시 한 수학학원에서 교사가 '주머'로 강의하고 있다.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혼연일체

25일 경기도 광명시 '고수학' 학원의 한 강의실에선 강사와 학생, 그리고 줌을 이용한 학생이 함께 수업을 하고 있었다. 노트북 화면 속에 있는 학생은 마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교실에 앉아 있는 학생과 함께 설명을 듣고, 문제를 풀며 질문을 했다. 물리적 공간에는 영향을 받지 않고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한자리에 있었다.

주머는 현실을 본떠 만든 가상현실 게임부터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무너진 증강현실(AR) 게임까지 경험하고 있다. 2016년 Z세대 사이에서 광풍을 일으킨 '포켓몬 고'는 현실 속에서 가상을 체험하게 해줬다. 이런 경험 덕분에 이들은 철저한 디지털 원주민이면서도 그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주머의 이런 유연함이 역설적으로 코로나 시대 소통의 힘이다. 오프라인에서는 비대면이지만 온라인에서는 대면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한규 상무는 "코로나 사태 이후 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교육기관에서 동영상 강의를 통한 학과 이수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교육뿐 아니라 모든 생활환경에서 Z세대 중심의 라이프 스타일이 퍼져 나갈 것"이라고 했다.

☞주머(Zoomer)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 사이에 태어난 Z세대와 베이비부머의 부머(boomer)를 합친 말. 코로나 사태로 이 세대가 화상 앱 줌(Zoom)을 일상적으로 쓰면서 '줌을 사용하는 세대'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줌 화상 연결 '끙끙'… 결국 막내가 선배를 가르쳤다

조직마다 '역멘토링' 일상화

안병현

"배경은 어떻게 바꾸는 거지?"

"○○씨는 왜 아직 안 보이는 거야?"

"왜 내 목소리만 안 들릴까?"

'아무튼, 주말'을 제작하는 본지 주말뉴스부는 23일 오전 9시 40분 줌으로 '월요회의'를 열었다. 9시 50분에 회의가 끝났다. 딱 10분. 평소 같으면 사무실과 회의실을 왕복하는 시간 동안 회의를 끝낸 셈이다. 이날 회의가 짧은 시간에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었던 것은 20일 예행연습을 했기 때문이다.

이 부서에는 '주머'라고 할 만한 Z세대 기자가 한 명도 없다. 20대 후반부터 40대 후반까지 X, 밀레니얼 세대가 골고루 섞여 있고, 최연소자가 27세로 Z세대에 가장 가깝다. 줌 이야기가 나왔을 때 이를 알고 있던 기자는 단 한 명. X세대에 속하는 그는 중학생이 된 딸을 통해 알았다고 한다. 줌 사용자는 한 명도 없었다. 일단 화상 회의를 제안한 기자가 앱을 내려받아 부장과 부원을 회의에 초대했다. 화면에 자신을 나오게 하는 방법부터 배경을 바꾸는 방법까지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한 것은 줌을 직관적으로 이해한 입사 2년 차 막내 기자였다.

이처럼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가르치거나 도움을 주는 상황을 역(逆)멘토링이라고 한다. 멘토링은 원래 선임자가 후임자에게 조언하고 가르치는 것. 역멘토링은 1999년 제너럴일렉트릭(GE)의 CEO 잭 웰치가 정보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사내에서 시행한 제도다. 이 시기에 닷컴 기업이 부상하고 일반 기업의 전산화 과정에서 후배가 선배를 가르치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하나의 기업 문화로 자리 잡았다.

역멘토링이 다시 시작된 것은 SNS가 등장하고 나서부터다. 기업에서 SNS를 이용한 마케팅이 중요해지면서 20대 신입사원이 기획을 주도하거나 임원이 평사원에게 조언을 구하는 경우가 생겼다. 지난해 2년 차의 20대 사원이 기획한 홈플러스 인스타그램 계정이 성공을 거뒀다. B급 콘텐츠로 충주시의 페이스북과 유튜브를 화제로 만든 주인공도 임용 3년 차의 8급 공무원이었다.

코로나 사태 때 교수들이 온라인 강의를 하기 위해 '디지털 조교'의 힘을 빌린 것도 역멘토링에 해당한다. 최재붕 교수는 "코로나 사태가 끝난 후 디지털 플랫폼이 표준 문명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며 "새로운 세대를 통해 앞으로의 변화를 경험하고 배운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