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욱 작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서로마를 침략했던 이민족들은 자기들이 로마의 계승자라 주장하며 진짜 로마였던 동쪽 로마를 역사에서 지웠다. 나중에 프랑스·독일·이탈리아라는 이름으로 뻗어나간 그들은 동로마를 그리스인들의 왕국으로 격하시켰고 비잔틴 제국이라는 이상한 이름을 붙여줬다. 그 결과로 우리는 지금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1453년이 아닌, 단지 서쪽 로마 황제가 사라진 476년을 로마 멸망의 해로 부르고 배운다. 패장(敗將)인 히틀러도 마찬가지다. 승전국의 사가(史家)들은 히틀러에게 장기적인 계획이 없었고 독일의 폴란드 침공 후 영국과 프랑스가 선전포고를 하자 당황했으며 특히 영국을 두려워했다고 말한다. 정말 그랬을까. 히틀러는 자신의 저서인 ‘나의 투쟁’에서 일찌감치 세계 정복의 청사진을 공개한 바 있다. 영국과 이탈리아는 동맹국 혹은 호의적인 중립국으로 삼고 프랑스는 알맹이를 제거하여 무력화시킬 것이며 가장 큰 적은 러시아인데 정복한 뒤 항구적으로 지배한다는 것이다. 계획과 망상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해서 그렇지 히틀러에게는 다 계획이 있었다. 거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 처칠이다.

66세 중늙은이 처칠의 총리 등판을 히틀러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취임 연설에서 결사 항전을 외쳤지만 의례적인 대국민 담화 정도로만 생각했다. 하긴 사냥개가 짖는 것 같은 히틀러의 신경질적인 연설에 비해 내내 웅얼대는 처칠의 연설에는 박력이 없었다. 물론 히틀러의 자신감에는 근거가 있었다. 군사 부문 최대의 업적이기도 했던, 자신이 창설한 전차 군단이다. 다소 느슨하게 진행된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합병과 폴란드 침공은 독일군의 진짜 실력이 아니었다. 본편은 그로부터 7개월 후 화려하게 펼쳐진다. 1940년 5월 10일 독일군의 '낫질 작전'이 시작된다. 우리가 흔히 전격전(電擊戰)이라고 부르는 이 기동전은 순식간에 벨기에와 네덜란드의 국경을 허물고 프랑스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기분 나쁜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급강하하는 독일 슈투카 폭격기에 진저리를 치다 보면 어느새 독일 보병이 코앞에 와 있었다. 보름은 걸릴 거라고 예측했던 거리를 독일 보병은 사흘 만에 주파했다. 퍼버틴이라는, 메스암페타민 계열의 마약 덕분이었다. 이들은 퍼버틴을 사탕처럼 씹어 먹으며 사흘 밤낮을 잠도 안 자고 달렸다. 발군(發軍) 열흘 만에 독일군은 320㎞를 진격해 영국해협에 도달한다. 낫질이 계속 진행되었으면 히틀러의 계획은 순조롭게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히틀러는 자신이 최종 명령권자라는 것을 전군에 알리고 싶다는 황당한 이유로 진격을 중지했다. 오른팔인 공군대장 괴링의 공명심도 한몫을 했다. "연합군을 쓸어버리는 영광은 독일 공군이 수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사료됩니다." 이렇게 오기와 오만이 오락가락하는 사이 덩케르크에 고립되었던 33만 연합군은 860여 척의 군민(軍民) 연합 어선을 타고 탈출에 성공한다.

일러스트=박상훈

배트맨의 재해석으로 명성을 떨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이 철수 작전을 동명의 영화에 담았다. 독일군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괴상한 전쟁 영화인 ‘덩케르크’는 복잡한 이야기를 쉽게 풀어내는 탁월함으로 리얼리즘 전쟁 영화의 정점인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넘어섰다. 이 영화에 처칠은 실물이 아닌 연설로, 그것도 신문 지면에 실린 글로 등장한다. 절대 항복하지 않겠다는 이 연설에는 그러나 매우 위험한 발언이 들어 있다. 가까운 장래에 강력한 힘을 가진 신(新)세계가 구(舊)세계를 해방할 것이라는 문장이다. 당연히 신세계는 미국을 의미한다. 처칠은 미국의 개입 없이는 그 전쟁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승리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조국을 제물로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영국의 공장에서는 24시간 내내 무기만을 생산했고 보유한 외환은 남김없이 무기 구입에 털어 넣었다. 영국이 파산하면 당신네도 재미없을 것이라는, 미국에 대한 일종의 자해 공갈이었다. 도박에 가까운 처칠의 이 미친 짓은 결국 미국의 참전을 끌어낸다. 영국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명백한 국가 반역자였다. 2차 대전에서 처칠의 최대 공적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다. 시기를 계산한 것도 처칠이었고 상륙 지점을 혼동하도록 공작을 펼친 것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거기까지만 했으면 좋았을 텐데 처칠은 자기가 앞서서 상륙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처칠의 야심을 주저앉힌 건 말더듬이 왕 조지 6세였다. “나, 나도 참가하겠소. 내, 내, 내가 왕이니까 다, 당신은 내, 내, 내 뒤를 따르시오.” 동글동글한 이 영국인의 미친 짓에는 유머와 애교가 있었다. 아직도 세계인들이 처칠을 기억하고 사랑하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