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정치가 조광조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여권(與圈)이 최근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조선 시대 정치가 조광조(1482~1519)에 빗대자 동양대 전 진중권 교수가 “역사를 바로 알자”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역사적 인물인 조광조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황희석 전 법무부 국장은 최근 “‘조’를 생각하면 중종 때 개혁을 추진하다 모함을 당해 기묘사화의 피해자가 된 조광조 선생이 떠오르고, ‘대윤’ ‘소윤’ 하면 말 그대로 권력을 남용하며 세도를 부리던 윤임·윤원형이 생각난다”고 했었다.

조광조는 조선 성종 13년인 1482년 개국공신 출신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출생 당시엔 집안의 권세가 높진 않았고, 부친은 중급 관리를 지냈다. 조국 전 장관 부친은 부산의 사업가로, 사학 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조광조는 29세에 진사시에 장원 급제했고, 성균관에서 공부했다. 당시 유생 200명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다고 한다. 반면 조 전 장관은 언론 인터뷰 등에서 “사법시험 등에는 응시하지 않았다”고 했었다.

조광조는 중종 10년인 1515년 중종의 첫 왕비였던 폐비 신씨(단경왕후)의 복위를 주장하는 신하들이 처벌받자 “전하께선 언로(言路)를 여셔야 한다”며 이에 반대했다.

이를 계기로 조광조는 임금의 총애를 받게 됐다. 불과 3년 동안 종6품 사간언 정언에서 종2품 사헌부 대사헌(장관급)까지 승진했다. 조선 역사에서도 유례가 드문 ‘고속 승진’으로, 서울대 교수를 하다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 법무부 장관을 지낸 조 전 장관의 행보와도 겹치는 면이 있다.

그러나 기존 반정 공신들에 반대하는 정책을 지나치게 밀어붙이는 조광조의 꼿꼿한 태도에 중종은 염증을 느끼게 된다. 결국 조광조는 기묘사화(1519년)을 계기로 실각, 사약을 받는다. 37세 나이였다.

여권 인사들은 “기득권 세력의 집요한 공격을 받아 몰락한 조광조와 조국 전 장관이 겹치는 면이 있다”고 했다. 조 전 장관이 청문회 때부터 야당과 언론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됐고 결국 ‘검찰 개혁’의 꿈을 접고 물러났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중종이 조광조에게 끝내 사약을 내린 것과는 달리, 문재인 대통령은 조 전 장관이 물러난 뒤에도 그에 대한 애착을 드러냈다. 문 대통령은 지난 1월 “조 전 장관의 기여가 대단히 크다. 조 전 장관이 지금까지 겪었던 고초만으로 크게 마음의 빚을 졌다”며 “조 전 장관을 놓아줬으면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