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이 세계 연구의 중심지인 미국과 유럽으로 확산하면서 과학계에도 비상이 걸렸다. 과학계는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을 차단하기 위해 전 세계 과학자들이 이용하는 대형 연구 시설을 폐쇄하고, 국제 학술 대회를 잇따라 연기하거나 취소했다. 대학 연구실 출입도 제한되면서 의학과 생명과학 연구에 필수적인 실험동물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다. 병원에서 진행되던 임상시험은 물론 북극 바다 연구 선박도 코로나 바이러스에 발목을 잡혔다. 과학계는 초유의 연구 중단 사태로 핵심 장비만 유지한 채 모든 자원을 코로나 극복에 집중하고 있다.

대형 시설 폐쇄 학회는 취소

미국 에너지부(DOE)는 지난 17일부터 산하 국립연구소 17곳에 대해 외부 과학자의 방문 연구를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브룩 헤이븐 국립연구소와 아르곤 국립연구소, 페르미 가속기연구소 등 DOE 산하 연구소는 한 해 3만명 넘는 외부 연구원이 찾는 세계적인 연구기관들이다. DOE는 산하 연구소에 핵심 연구 인력 외에는 재택근무를 하라고 지시했다. 오크리지 국립연구소는 세계 최고의 수퍼컴퓨터인 '서밋'을 코로나 연구에만 쓰도록 했다.

세계 최대 과학 연구 시설인 스위스의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도 코로나 감염에 대비해 핵심 인력 외에 출입을 금지했다. 현지에서 연구 중인 미국 스토니브룩대의 존 홉스 박사는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와 인터뷰에서 "가속기 시설로 들어가지 못해 1시간이면 될 전자 장비 설치를 3시간 동안 전화로 지시해 겨우 작업을 마쳤다"고 말했다. 이탈리아의 암흑물질 연구 시설인 제논도 현지 코로나 환자 급증으로 외국 연구자가 오도 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됐다.

과학 학술 행사도 잇따라 취소되고 있다. 5만5000명을 회원으로 둔 미국물리학회는 지난 1일 미국 덴버에서 열기로 했던 춘계 학술 대회를 시작하기 불과 34시간 전에 취소했다. 1만명 넘는 과학자가 참석할 것으로 예상됐는데 상당수가 질병예방통제센터(CDC)가 여행 자제를 권고한 코로나 발병 국가에서 오기 때문이었다. 매년 80여국에서 2만4000명 넘는 전문가가 참석하는 세계 최대 미국암학회(AACR) 연례회의는 다음 달 24일에서 연말로 연기됐다.

2월 말레이시아에서 개최 예정이던 국제감염병학회는 9월에 열기로 했다. 또 중국 상하이에서 지난 13일부터 열릴 예정이던 줄기세포재생의학 학회와 다음 달 1일 싱가포르에서 열릴 예정인 에너지 학술 행사는 무기한 연기됐다. 강원도 홍천에서 6월 개최 예정이던 아시아 해양지구과학회(AOGS)는 행사가 아예 취소됐다. 김영오 서울대 건설환경공학부 교수는 "강원도에 3000명 이상 모이는 국제 행사가 흔치 않은데 취소 결정이 나자 해당 지역에서 무척 아쉬워했다"고 말했다.

각종 연구·실험 중단

대학과 연구소가 연구자의 출입을 제한하면서 실험이 중단되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연구원이 실험동물을 보살피기 위해 실험실에 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버드 보건대의 세라 포천 교수는 지난 19일 교지 하버드 가제트와 인터뷰에서 "2018년 15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결핵균을 연구하고 있지만, 코로나 때문에 연구를 완전히 중단했다"고 밝혔다. 연구원들은 배양하던 병원균을 파괴하고 실험용 마스크 15상자와 보호복 500벌, 수술용 장갑 4000개를 코로나 환자를 치료하는 의료기관에 기증했다. 앞서 하버드대는 지난 18일 이공계 단과대에 꼭 필요한 과제나 장비를 제외하고는 모든 연구를 잠정 중단하도록 권고했다.

미시간주립대의 리처드 렌스키 교수는 사이언스지에 "1988년 이래 7만3000세대 넘게 배양해온 대장균을 냉동하고 32년 만에 처음으로 실험을 중단했다"고 밝혔다. 병원에서는 임상시험이 대부분 중단됐다. 임상시험을 위해 환자가 병원에 출입하다가 코로나에 감염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의약품 원료의 80%가 중국과 인도에서 생산되고 있어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하면 의약품 연구와 생산에도 피해가 예상된다.

◇북극 탐사 선박 발 묶여

코로나 여파는 북극에도 퍼졌다. 북극 탐사 프로젝트 '모자익'의 마르쿠스 렉스 박사는 지난 11일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북극 연구 선박 폴라스턴에 합류하려던 한 과학자가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아 격리됐으며 같은 항공팀원 20명도 바이러스 검사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모자익은 쇄빙 연구선 폴라스턴을 지난해 10월부터 북극 바다에서 13개월간 무동력으로 표류시키면서 북극의 환경변화를 연구하는 프로젝트다. 예산 1900억원을 들여 한국 등 19국 연구진 900여 명이 참여하고 있다. 하마터면 북극의 연구선이 일본에 정박했던 크루즈선처럼 바다에 떠 있는 거대한 바이러스 배양접시가 될 뻔했던 것이다. 모자익은 연구 선박으로 가는 항공편을 다음 달까지 중단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