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히 바라던 무대였다. 2016년 트로트 앨범 ‘미워요’로 데뷔한 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버스킹을 하며 사람들 앞에 서기도 했다. 하지만 트로트를 부르는 순간 뿔뿔이 흩어지는 청중들. 떠나가는 이를 붙잡아 보고 애걸도 해봤지만 돌아오는 건 냉정한 뒷모습뿐. 언젠간 내 노래를 들어주고 알아주겠지, 했다가도 노래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던 시간이 있었다.

시청자를 향해 큰절을 올리는 임영웅(29)은 어깨로 울고 있었다. TV조선 ‘미스터트롯’ 1대 진(眞)의 주인공. 시청자 앞에 선 3개월간의 여정, 아니 노래를 시작한 그 순간부터의 시간이 그의 머릿속을 빠르게 지나갔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짧게나마 아버지와 함께 보냈던 즐거웠던 어린 시절부터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섯 살 때 자신의 곁을 떠난 아버지 기일에 맞이한 결승. 애틋함은 추억의 산술적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그리움은 산이 되어 그에게 감정이란 해일을 일으키고, 시청자의 마음을 집어 삼켰다.

미스터트롯 眞 임영웅

그는 목소리로 시를 썼다. 그가 말하듯, 속삭이는 듯 읊조리는 단어 마디마디가 가슴 속에 내려앉아 듣는 이의 마음의 상처를 부드럽게 유려하게 어루만졌다. 담담했기에 더 절절하고, 담백했기에 더 가슴 미어졌다. 마음껏 울어도 된다고, 이젠 괜찮아 질 거라고, 고생 많았다고, 그는 목소리로 우리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사실 최고의 실력과 기량을 보여줘야 할 결승 무대에선 최상의 컨디션이 아니었다. 경연 내내 그에게 고민과 고통, 또 다른 희열을 주었던 춤 연습을 하다 목 디스크 증상이 심해졌다. 인터뷰 날도 침을 100대 맞고 왔다고 했다. “그냥 피가 좀 많이 났을 뿐, 괜찮다. 아프지 않다”는 말만 반복했던 임영웅. “가수 데뷔하면서 수첩에 ‘2020년 엄마 생일에 1억 주기’란 메모를 했었는데, 돌이켜보니 신기해서 깜짝놀랐다”는 그는 “‘아직 내가 꿈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구나’란 생각에 울컥했다. 지나간 세월이 더 아름답고 극적이게 느껴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임영웅이 眞이 된 후 소감을 말하고 있다

처음부터 가수의 꿈을 꿨던 건 아니었다. 어릴 적 친구들이 노래좀 한다며 ‘진달래꽃(마야 노래)’이란 별명을 붙여주긴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어려웠던 형편에 고등학교때부터 공장 아르바이트를 다니며 조금이라도 집에 보탬이 되고 싶었던 그다. “고 2때 취업반에 가게 되면서 음악에 눈을 뜨게 됐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노래를 학원에서 배운다는 걸 생각도 못했거든요. 노래하면서 돈을 벌 수도 있다는 걸 생각도 못했던 거죠. 친구 따라 지원했는데, 전 B등급으로 간신히 합격했어요.”

2015년 포천 시민가요제 등을 포함해 가요제에서 상도 곧잘 받았다. 지금의 소속사 대표도 만났다. 데뷔는 순조로웠다. 하지만 앨범을 내는 것과 가수로 이름을 알리는 건 차원이 달랐다. “‘미워요/소나기’라는 디지털 싱글앨범으로 데뷔했는데, 다소 발라드 느낌이었지요. 신인 가수가 그런 걸로 시작해서는 솔직히, 당장 굶어 죽을 것 같더라고요. 신나는 노래가 있어야 행사에서도 차비라도 주고 불러주지, 버틸 수 있는 힘이 없었어요. 앨범만 냈지 누가 불러주지도 않았거든요. 작은 무대라도 있으면 바로 찾아갔습니다. 전국 어디든. 너무 고마웠어요. 저를 찾아주시는 어머니 아버님께. 어르신들이랑 즐겁게 지내면서 평생 이렇게 효도하는 마음으로 노래하며 살아야겠다 했지요.”

KBS 아침마당에 출연해 5연승도 해보고, 가요무대 등 각종 프로에서 어엿한 가수로 인정받긴 했지만, 대중을 향한 문턱은 높기만 했다. 그랬던 그에게 미스터트롯은 꿈처럼 찾아온 선물이었다. “아무것도 없었는데, 거의 무명이나 다름없었는데, 사람들이 많이 알아주시고 제 음악을 많은 분들이 들어주시고. 정말 좋지요. 아직도 꿈꾸는 것 같아요.”

미스터트롯에서 그는 첫 등장부터 돌풍을 일으켰다. 홀어머니를 떠올리며 불렀다는 ‘바램’(원곡자 노사연). 그가 담담하게 건네는 “우리는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란 노랫말이 커다란 울림을 줬다. 정통 트로트 장르에 도전한 조용필의 ‘일편단심 민들레야’를 거쳐 레전드 미션곡 ‘보라빛 엽서’에선 원곡자인 설운도로부터 “나는 저렇게 감정을 담아 부르지 못했다”는 극찬을 끌어내기도 했다.

그는 지독한 연습벌레다. 호흡을 어디서 쉴지, 어디에서 세게 부르고 약하게 할지. 여기서 저기서 멈춰보고 강약도 주고, 여기서 긁어보기도 하고, 저기서 살살 불러보기도 하면서 수만 개 조합 중에서 최적의 소리를 찾은 뒤 몸에 익을 때까지 연습했다. 연습시간은 10시간을 훌쩍 넘기기 일쑤다. 그렇다고 형식에만 얽매인 것도 아니다. 트로트가 트로트다워야 한다는 것도 어쩌면 편견이다. 그는 형식적 완성도를 넘어 임영웅식 감성적 트로트의 세계를 구축해왔다. 목소리에 서린 따뜻함과 배려는 위로와 안식이 됐다. 기계처럼 보일 법한 그의 완벽주의에 사람 향기가 배어있는 건 체온이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가 주는 힘이다.

누구보다도 대범해 보였다. 동료들 역시 무대 앞에 선 그의 의연함과 담대함을 꼭 배우고 싶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그는 손사래다. “떨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엄청 떨었거든요. 너무 긴장되고, 한 무대마다 너무 죽을 거 같고, 바들바들 떨리는 데 겉으로는 그걸 안정된 거처럼 해야 뭔가 컨트롤이 된 거 같아 보이니까, 안 그런 척 연기한다고 한 건데.”

인생을 걸고 나온 프로그램. 절실했기에 그의 어깨는 점점 더 무거워져만 갔다. 당장에라도 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항상 그를 엄습했다. 녹화와 첫 방송 간의 시간차는 두 달. 방송 나온 뒤 터져나올 인기를 미리 체감할 수도, 예감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기쁨의 눈물을 흘렸던 만큼, 상처도 입었다. 트로트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데도, 잘 할 수 있는데도, 사람들은 너무 쉬운 말들로 그의 심장에 비수를 꽂았다.

그가 최고의 무대로 꼽는 ‘트롯에이드’ 에이스전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원곡자 김목경)는 임영웅에게 또다른 해탈이었다. 3명의 다른 팀원 인생까지 걸린 경연. 무게감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냥’ 잘해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연습 또 연습. 이전보다 더 낫게 들릴 수 없을까, 고민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마치 막다른 골목에 갇혀 숨이 턱 막히는 것 같다고 생각할 즈음, 마이크로 소리가 쫘악 빨려드는 소리에 귀가 트였다. 평소 즐겨부르던 휘파람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살 길은 자신 안에 있었다는 것을. 노래를 할 수 있기에 꿈꾸듯 좋아했던 그동안의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놓아버릴까 하는 순간에 스스로를 다잡으며 포기하지 않고 걸어왔던 축적된 시간은 혼돈 속에 길잡이가 돼 그를 인도하고 있었다. 그가 부른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는 공식 유튜브에서만 1310만여 조회수를 기록했다. 임영웅이 가는 길은 곧 기록이었다.

임영웅에게 미스터트롯은 여러 가지로 극복이었다. 노래를 포기할까 좌절했던 시절에 대한 보상이었고, 사람들 앞에 서기 미안했던 얼굴의 깊은 상처도 스스로 받아들이게 했다. 춤에 대한 두려움도 어느새 씻겼다. 어르신들과 어우러져 댄스를 곁들이는 모습이 그 누구보다 즐거워 보였지만, 속으론 리듬 타는 게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몸은 쓰는데 춤은 아닌 것 같을 때의 그 좌절감. 그는 “오르지 못할 산을 정복한 기분”이라며 웃었다.

고향인 경기도 포천 거리는 요즘 임영웅 축하 플래카드로 가득하다. 어디로 향하든 그를 알아보는 이들로 가득하다. 곧 와줄 것만 같았던, 그래서 내뱉을 수 있었던 ‘구해줘요 히어로’에 대한 답은 허공 속 산화되는 외침일 수 있다. 위인전 한 토막 같은 그의 미스터트롯 서사가 영웅신화로 승화될 수 있을까. 그는 말한다. “어제도, 오늘도 그랬듯, 내일도 변함없이 노래하겠다”고. 임영웅은 임영웅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