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공력이 한 방에 무너질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죠(웃음). 하지만 위기는 늘 기회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TV조선 '내일은 미스터트롯' 결승전이 열린 12일 밤, 최종 우승자를 발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MC 김성주(48)의 머리를 스친 생각이다. 전국의 시청자가 그의 입만 바라보던 순간, 제작진이 건넨 큐시트 세 장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773만1781표' '집계를 끝내지 못했습니다' '다음 주 목요일 밤 10시에 결과 발표합니다'.

'슈퍼스타 K' '복면가왕' '미스트롯' 등 서바이벌 경연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온 그에게도 초유의 고비였다. 당혹했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위기 때 가장 중요한 건 솔직함!" 시청자 문자 투표 집계가 늦어지자 "이제 전 뭘 해야 할까요?" "저 좀 살려주세요"라고 눙치며 위기 초반을 넘긴 그는 당일 발표가 어렵다는 사인을 받고 제작진에게 "'총투표 수'만큼은 내게 꼭 알려달라"고 신신당부했다.

‘미스터트롯’의 MC를 맡아 석 달간 활약한 김성주가 17일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후련한 표정으로 웃고 있다. 그는 “우승 발표를 앞두고 모두가 제 입만 바라보는 그 순간, 1등의 이름 석 자를 시원하게 외칠 때의 쾌감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를 것”이라고 했다.

"방송을 다시 보니 제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더라고요. 화가 난 게 아니었어요. '사과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송구스럽습니다' '양해를 구합니다'… 어떤 단어를 사용해야 시청자들이 더 너그럽게 이해해주실까 고민한 거죠." 표정은 굳었지만, 목소리엔 흔들림이 없었다. "늦어진 만큼 더 정확하고 공정하게 발표해 드리겠다"는 모습에 "김성주가 MC라 가능했다" "미스터트롯의 또 다른 진(眞)이다"란 반응이 쏟아졌다. 이찬원은 무대에서 "김성주 선배님이 왜 명MC란 말을 듣는지 알 것 같다"고 했다.

최종 우승자를 발표한 14일 특별 생방송에선 김성주가 시청자 문자 투표 계산법을 반복해 설명하는 모습이 화제가 됐다. "수학 인강 듣는 줄 알았다"는 반응이 나왔을 정도. 그는 "어린 학생부터 어르신들까지 모두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대기실에서 숫자를 따져 가며 계산해 봤다고 했다. "3위인 영탁이 득표율 1%만 높아도 이찬원과 임영웅을 뒤집을 수 있다"는 멘트는 그래서 가능했다.

‘미스터트롯’ 최종 우승자가 발표된 14일, 이찬원(오른쪽)이 “선배님은 명MC”라고 말하자 김성주가 부끄러워하며 웃고 있다.

오디션 프로그램 MC로 김성주가 가진 철학은 확고하다. 한두 후보에게 특별한 애정이 느껴지는 제스처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출연자들과 말도 잘 섞지 않는 이유다. 그럼에도 이번 미스터트롯에선 마음 끌리는 순간이 많았다. 임영웅 무대가 특히 그랬다. "일부러 딴생각을 하고 큐시트를 뒤적거렸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쏟아지더라고요. 영웅씨 목소리는 참 부드러운데 사람의 마음을 휘젓는 힘이 있어요."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 준결승전에서 벌인 영탁과 신인선이 듀엣으로 부른 '또 만났네요'. "얼마나 연습을 많이 했는지, 무대가 어마어마했어요. 정말 '미쳤다' 싶었죠."

'시청률 35%'의 무게는 컸다. 경력 20년의 베테랑 MC에게도 월드컵 축구 중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매회 방송에서 '내가 이 무게를 견딜 만큼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끊임없이 물어야 했다. 그는 "문자 투표에서 무효표가 많이 나온 점도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했다. "문자에 익숙하지 않은 어르신들을 더 배려해 드렸어야 했죠. 진행자로서 더 많은 경우의 수를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 죄송할 뿐입니다."

시청자 문자 투표에선 '김성주'를 적어 보낸 시청자들도 꽤 많았다고 한다. 모두 무효표가 됐지만, 석 달간 목이 쉬도록 고군분투해 온 MC를 향한 격려의 목소리였다. "제가 원래 '60초 후에 공개합니다'의 대명사잖아요. '왜 그리 질질 끄느냐'는 욕도 많이 먹었죠. 그런데 이번 미스터트롯에선 그조차 칭찬해 주시더라고요. 경제 위기와 코로나로 힘든 시기에 미스터트롯이 그만큼 국민에게 큰 위안과 힘이 돼 드린 것 같아 행복합니다. 저 역시 방송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