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윤 문화부 차장

"엄마, 우리 아빠 없는 거, 남들한테 말하면 안 되지?"

그날따라 봄 꽃망울이 소담스레 길 벽을 환히 밝힙니다. 엄마 새끼손가락만 살짝 잡은 열 살 아이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에는 엄마, 아빠, 아이가 서로를 향해 웃는 가족들에게 향했지요. 침묵은 때론 도피처라 했나요. 아빠의 빈자리는 벌써 5년. 갑작스러운 사고였습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몇 날 며칠을 울다 소리치다 울다 소리치다를 반복했을 때 눈에 들어온 게 흙바닥에서 뛰놀던 아이였습니다. '그래, 우리 둘이 잘 살아보자.'

아이의 눈빛은 아빠와 똑 닮았습니다. 생각이 많은 듯 표정을 읽을 수 없다가도, 마냥 아이 같기만 했지요. 임신을 처음 알렸을 때, 덩실덩실 춤을 추던 그이는 방으로 손을 끌더니 어디서 났는지 커다란 옥편을 꺼내옵니다. "영웅이 어때? 세상을 구하는 영웅. 남자답고 이름 좋잖아! 우리의 영웅이야!" 사람은 이름 따라간다지만, 너무 센 이름은 좋지 않다던데, 애 놀림당하면 어쩔 거냐는 투정에 돌아오는 그이의 말. "둘째 낳으면 본색으로 지을 건데? 하하하!"

'우리의 영웅이'는 항상 단단해 보였어요. 내가 남의 머리를 만지며 하루 벌어 하루 먹는 궁핍한 삶에도 영웅이는 울지 않았지요. 영웅이는 자기가 정말 영웅이라도 된 양 "엄마 내가 뭐 도와줄까?"가 인사였어요. 그랬던 아이의 얼굴이, 피범벅으로 일그러졌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어느 날 밤. 뛰어놀다 주차장의 녹슨 쇠 양동이에 얼굴 광대 쪽을 찧었다고 하더군요. 부식된 양동이 끝은 칼날처럼 벼려 있었고, 아이의 여린 피부는 속절없이 뚫리다시피 베인 겁니다. 쇳가루가 얼굴에 진창이었지요. 피가 철철 흘러 티셔츠를 붉게 물들였는데도 아이는 "뭐가 자꾸 흐르기에, 그냥 땀인 줄 알았어"라 말합니다. 30바늘을 꿰매는 수술. 의사 선생님은 "신경이 죽어 입이 제자리를 못 잡을 수 있다"고 합니다. 어느 날인가, 놀림을 받았는지 아이는 눈물 자국이 배어 잠들어 있었지요. 잠든 영웅이 얼굴에 약을 발라주다 문득 뒤로 훔치던 눈물에 깨어난 것인지, 영웅이는 실눈으로 방긋방긋 웃어 보이며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 내 얼굴엔 나이키가 있어! 이거 보조개 같지 않아?"

요즘 미용실에 평소 못 보던 얼굴이 많이 찾아옵니다. 땅끝마을 해남에서 오신 분도 있고, 강원도 산골에서 찾아주신 분도 있지요. 한 어머님은 내 손을 꼭 잡으시더니 말없이 한참을 우십니다. "몇 년을 병상에서 햇빛도 많이 못 봤었는데, 그때 임영웅씨의 '바램'을 듣게 됐네요. 지금 이렇게 일어나 여기까지 찾아올 수 있었던 건 영웅이가 준 힘입니다."

오랫동안 영웅이와 나, 세상에 우리 둘뿐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TV조선 '미스터트롯' 결승 무대에 선 영웅이를 보고 이제야 알았습니다. 그리 애만 태웠던 '그 입'으로, 아이는 평소 하고팠던 말을 노래로 대신하고 있었다는 걸. 누구도 혼자가 아니고, 세상을 향한 손은 먼저 내밀어야 한다는 걸. 7명 아이가 서로 격려하며 울고 부둥키는 그 목소리는 대한민국을 위로와 치유로 보듬어 왔다는 것을.

하염없이 눈물을 삼키다 '영웅'을 검색했습니다. 누군가의 글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우리답게 살 수 있는 건 '보이지 않는 영웅(unsung hero)'들 때문이라 합니다. 장애로 오래 살지 못한다고들 할 때, 유일하게 희망을 준 의사 선생님이 생각나 의료진에 기부하게 됐다는 대구 커피집 주인, 대구 지하철 참사 때 봉사했던 기억으로 이번에도 봉사를 자처했던 이들…. 나만의 영웅이인 줄 알았는데, 대한민국 도처에 영웅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