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빌 게이츠는 자신이 투자한 오물 정화기에서 나온 물을 곧장 들이켰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인사이드 빌 게이츠'의 한 장면이다. 그 물이 깨끗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보는 사람은 꺼림칙한 기분이 든다. 기왕 불쾌한 김에 이런 상상도 해보자. 크기와 모양, 색깔 모두 대변과 똑같이 생긴 초콜릿이 있다고 말이다. 고급 재료에 좋은 향이 난다. 하지만 과연 그것을 즐겁게 먹을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바로 '혐오' 때문이다.

독자 여러분의 너그러운 양해를 부탁드린다. 이 불쾌한 주제, 혐오가, 오늘날 대단히 중요한 철학적 주제로 떠오르고 있다. 시카고대학교에서 로스쿨, 철학과, 고전학과 등 다양한 분과를 넘나들며 지적 사유를 펼치는 석학 마사 누스바움의 책 '혐오와 수치심'을 통해 들어가 보자.

혐오는 몸 안에 들어와서는 안 되는 무언가가 몸 안에 들어올 우려가 있다고 느껴질 때 발생한다. 머리로는 알아도, 방금 눈앞에서 배설물을 정화한 물을 마시거나 대변 모양 초콜릿을 먹는 것은 쉽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생물로서의 본능적 위기감은 이성을 압도한다.

'몸 안에 들어오면 안 되는 것'이 생리적 이유로만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가령 힌두교 신자는 윤회설을 믿는다. 따라서 어떤 동물을 먹는 것은 그 동물 속에 담긴 영혼을 일부 흡수하는 일이 된다. '비거니즘' 같은 말이 생기기 전부터 힌두교에 복잡한 채식의 등급이 나눠졌던 것은 '내 영혼'을 더럽히는 '다른 영혼'이 고기에 있다는 신앙 때문이었다.

일러스트= 안병현

비단 힌두교만이 아니다. 유대교, 이슬람교 등 많은 종교가 먹지 말아야 할 것들의 목록을 제시한다. 그런 것을 먹는 자들은 '이방인' '믿지 않는 자'로서, 해당 종교가 요구하는 정결함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근대 이전 사회에서 '불결한 타자'들은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거나, 위태로운 신분 상태에 놓이기 십상이었다.

꼭 종교가 거론되지 않아도 마찬가지다. 개를 먹는다고 한국인이 비하당해 온 것이 불과 20여년도 안 된 일이다. 지금은 '애완동물'보다 '반려동물'이라는 말이 더 널리 쓰이는 세상이지만 말이다. 요컨대 우리도 '혐오스러운 것을 먹는 자'로서 누군가에게 혐오 대상이었다는 소리다. 더러운 것을 먹는 자들은 더럽다. 그 더러운 자들을 가까이하면 더러운 것이 옮는다. 혐오의 논리는 단순하지만 여전히 강력하다.

이렇게 길게 분석한 이유는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증 확산 때문이다. 중국에서 처음 바이러스 감염 증상이 나타났을 때만 해도 한국인 중 상당수는 무관심했고, 일부는 '박쥐를 먹는 식습관을 갖고 있다 해도 그들을 혐오해서는 안 된다'는 올바른 이야기를 하며 자신들의 정치적 감수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고, 없을 것처럼 보였다.

과연 그 시점에 중국으로부터 모든 입국을 차단했다면 지금과 같은 확산은 없었을지, 과거로 돌아가 실험해볼 수 없다. 하지만 청와대와 정부가 '가능한 모든 유입 경로가 차단되는 게 제일 좋다'는 질병관리본부의 입장과는 다른 선택을 했고, 종교 활동과 회식 등 원활한 일상생활을 권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부 국민은 너무 안심했던지, 삼면이 바다에 북쪽은 휴전선으로 가로막힌 나라에 살면서, '입국을 차단해봐야 밀입국이 발생해서 추적이 어려워진다' 같은 황당무계한 소리를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주고받고 있었다. 그렇게 바이러스는 확산하고 잠복할 시간을 벌었다.

누스바움의 책으로 돌아가 보자. 법은 감정과 완전히 무관한 것 같고 그래야 할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형법을 놓고 보면 특히 그렇다. 가령 우리가 살인자를 처벌하는 것은 피해자에 대한 공감, 가해자에 대한 분노, 공포 등의 감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 반면 어떤 법은 혐오에 기반을 두고 만들어졌다. 국내에는 없었지만 동성애를 처벌하던 서구의 형벌들이 그렇다.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하기 위해 도입한 수많은 제도와 기구들 역시 결국은 혐오에 그 바탕을 두고 있었다. 분노나 두려움 같은 감정은 전적으로 긍정적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사회의 구성과 유지에 필수불가결하다. 반면 타 구성원의 생존과 안녕을 위협하지 않는 혐오와 수치심 등을 법의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 '혐오와 수치심'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그렇다.

근대 이전, 종교가 '정결'과 '불결'의 기준을 통해 사람들을 다스리고 억눌렀던 시절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하물며 국가가 혐오를 제도적으로 받아들이고 법의 근거로 삼기 시작하면 더욱 위험하다. 그렇기에 진보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이들은 그 어떤 혐오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에 가깝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혐오를 혐오하라'며 전도된 혐오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을 정당한 일로 여기기도 한다.

'혐오와 수치심'은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조국 전 장관의 추천사가 뒤표지에 붙어 있지만, '혐오 세력을 처벌하자'는 책이 아니다. 누스바움은 "인종주의자와 성차별주의자에 대해 그런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며 "그들이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으로서 그들에 대한 존중은 유지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너무도 상식적이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환영받기 어려운 주장일 수도 있겠다.

혐오라는 감정의 밑바닥에는 생물학적 거부가 있다. 그 자체를 박멸할 수는 없다. 그래도 국가는 혐오가 아닌 관용의 편에 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혐오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행태는 근절되어야 할 것이다. 가령 '우한 폐렴'을 혐오 발언이라고 개탄했다면, '대구 코로나' 같은 혐오 표현은 결코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살아 있는 박쥐를 사고파는 중국 사람들의 식습관을 인정한다면, 신천지가 아니라 그 어떤 종교 단체나 집단 활동도 감염에 취약할 수밖에 없음 또한 수긍해야 한다. 혐오에 대한 반대마저 네 편 내 편 따져가며 하는 자들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감염시키는 바이러스만도 못하다.

성경 말씀으로 마무리를 지어보자. 입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게 사람을 더럽게 한다. 먹는 것으로 사람 차별하던 바리새인들을 꾸짖는 말이었지만, 지금 우리에게도 절실한 가르침이다. 골고루 잘 먹고 면역력을 지키자. 그리고 기침은 꼭, 마스크나 소매로 가리고 하자. 혐오를 버리고 위생을 갖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