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제야말로 조선 영화를 생장시키느라고 그동안 가시밭을 걸어오면서 노력하다가 사라진 수많은 불우의 선구자들에게 바치는 최대의 감상일 것이며, 찬란한 앞날을 뚫어보는 영화 조선의 낭만이니, 문화사의 한 연대는 이날로서 한 매듭을 지어야 할 것이다."

1938년 11월 27일 '영화제' 개최를 하루 앞둔 26일자 조선일보 2면 기사 '대망의 금일! 드디어 개봉 제1회 영화제' 기사는 감격으로 넘쳤다. 행사 제목 역시 '조선일보 영화제'가 아닌 '영화제'였다.

왼쪽 영화 '임자없는 나룻배'는 당대 명배우 나운규(왼쪽)와 문예봉(오른쪽)이 주연을 맡아 조선일보가 연 첫 '영화제' 독자 투표에서 무성영화 2위를 차지했다. 가난과 핍박으로 눈물겨웠던 조선인들의 삶을 다룬 작품이었다. 가운데 '멍텅구리'는 우리나라 첫 신문 연재만화인 조선일보 '멍텅구리'를 각색해 스크린으로 옮겼던 작품. 오른쪽은 조선일보 독자 투표 유성영화 1위에 오른 석영 안석주 감독의 '심청전'.

사흘간 계속된 영화제는 조선일보 태평로 사옥과 부민옥 대강당에 구름 관중을 불러모았다. 당시 기사들엔 첫 영화제 모습이 생생하다. 개회식에선 "조선 영화를 위하여 노력하다가 세상을 떠난 나운규·심훈씨 등 고인을 추도하는 의미에서 일동이 1분간의 묵도를 올리고 영화제 만세를 삼창"했고, 관람객은 "그들이 고난의 길을 밟고 있는 조선 영화를 얼마나 사랑하는가 여실히 말하는 듯"했다. 영화의 대중적 영향력과 신문의 힘이 만나 시너지를 일으킨 최초의 풍경이었다. 한국 영화사 전문가인 김종원 영화평론가는 "공신력 있는 일간 신문이 사상 첫 영화제를 열어 관객 직접 투표로 최고 영화를 뽑게 하면서, 우리 영화에 대한 관심을 총체적으로 끌어올린 기획이었다"고 했다.

조선일보는 11월 9일 자 첫 사고(社告)를 시작으로 영화제 행사까지 총 30여 건의 기사를 내보내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영화 예술 수립의 문화적 일대성사"이자 "형로(荊路)를 걸어온 조선 영화의 금자탑"이었다.

'영화제'의 의미는 우리 영화사에 기록된 첫 영화제라는 데 그치지 않는다. 독자들은 최고의 영화를 투표로 뽑으며 '관객'으로서 자의식에 눈떴다. 할리우드와 일본 영화 틈바구니에서 막 싹을 틔우던 '조선 영화'를 되짚어본 계기였다. 조선일보 학예부에는 신문을 통해 공고한 후보작 총 45편(무성 33편, 유성 12편) 중 3편씩을 뽑은 독자 엽서 5000여 장이 도착했다. 이 투표로 뽑은 무성·유성 두 부문 '베스트 10' 영화도 조선일보에 실렸다.

영화제 상영작은 무성영화 1~3위작 '아리랑' '임자없는 나룻배' '인생항로', 유성영화 1~3위작 '심청전' '오몽녀(五夢女)' '나그네'였다. 모두 민족색 짙은 영화였다.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민족말살정책이 갈수록 가혹해지던 시기였다. 한국영상자료원 정종화 선임연구원은 "모두가 숨죽였던 엄혹한 시기, 미쳐버린 오빠가 어여쁜 동생을 뺏으려는 지주 앞잡이의 가슴에 낫을 꽂은 뒤 일본 경찰에게 붙들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갈 때, 관객은 이심전심 나라 잃은 아픔을 떠올렸을 것"이라고 했다. 김종원 평론가도 "직접 저항과 반일이 거의 불가능하던 시절 대다수 식민지 백성은 영화 속 상징과 울분에 차 내뱉는 독백 대사에 교감했을 것"이라고 했다.

조선일보에 영화라는 뉴 미디어는 '민족문화 지키기'의 중요한 수단이기도 했다. 1920년대 창간 초기부터 영화에 적극적 관심을 보였던 조선일보는 1926년 6월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인산(因山·장례)행렬 등을 시작으로 '조선일보 뉴스' 필름을 제작,영화관에 보급했다. 영화제가 열린 1938년에는 조선향토특산전람회를 열면서 산대도감, 봉산탈춤 등 전통 연희 공연과 명창, 고전무용, 판소리 등의 경연을 열었고, 필름 1200척(尺) 분량의 민속 기록영화 '조선의 민속'을 만들어 보급했다. 이후에는 '명산순례(名山巡禮)'를 영화로 만들어 소개했다. 중일전쟁이 치열해지고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후속 '영화제'는 열리지 못했다.

조선일보와 영화의 인연은 1963년 '청룡영화상' 제정으로 이어졌다.

['심청전' 만든 안석주… 심훈은 배우이자 영화감독]

안석주(왼족), 심훈

문화예술인이 붐볐던 조선일보 편집국에는 영화인도 많았다. 학예부장을 지낸 석영(夕影) 안석주는 화가, 신문 만화가, 가수, 연극배우, 소설가, 시인인 동시에 시나리오 작가 겸 영화감독이기도 했다.

조선일보에서 염상섭의 '삼대' 등에 삽화를 그리며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던 그는 1935년 영화 '심청전'을 감독해 발표하고, 1936년 8월 영화에 전념하기 위해 조선일보를 그만뒀다. '심청전'은 조선일보 '영화제' 독자 투표에서 유성영화 부문 1위를 차지한 인기작이었다.

'상록수' 작가로 널리 알려진 심훈은 1926년작 영화 '장한몽'에서 여주인공 심순애의 상대인 이수일 역을 맡은 배우이기도 했다. 심훈은 1927년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각색한 영화 '먼동이 틀 때'를 감독했다. 원제는 '어둠에서 어둠으로'였는데 "어둠이라는 말이 조선의 처지를 암시한다"는 당국 제지로 제목을 바꿔야 했다. 단성사 개봉 때 관객 5만명을 모았지만 영화사는 파산했고, 심훈은 조선일보에 입사해 영화 담당기자로 활약했다.

1923년부터 연재된 한국 신문 첫 연재만화 '멍텅구리 헛물켜기' 주인공 '멍텅구리' 역시 영화에 출연했다. 1926년작 영화 '멍텅구리'를 통해서다. 한국영상자료원은 "우리 영화사상 최초의 풍자적인 희극 영화"라고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