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이뇨?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의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의 그리 되여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면 조선민족의 그리 되여온 상태의 기록이니라."(조선일보 1931년 6월 10일 자).

신채호 선생 84주기였던 21일 청주 상당구 단재 신채호 기념관에서 시민들이 영정 사진을 바라보고 있다.

단재 신채호(1880~1936)는 자신의 역사관인 '아와 비아의 투쟁'을 조선일보에 연재된 '조선상고사'를 통해 처음 제시했다. 신채호의 주저(主著)인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는 1931~1932년 조선일보에 장기 연재되면서 세상의 빛을 보았다. '조선상고사'는 1931년 6월 10일부터 10월 14일까지 103회로 나뉘어 실렸다. '조선상고문화사'는 '조선상고사' 연재가 끝난 다음 날인 1931년 10월 15일부터 실렸다. 1차로 12월 3일까지 연재됐고, 다음 해인 1932년 5월 27일부터 5월 31일까지 모두 41회 실렸다. 조선일보는 연재 첫날인 1931년 6월 10일 "이 '조선사 강의'는 입옥(入獄) 전에 탈고하였던 것을 그(신채호)의 친우인 박용태(朴龍泰)씨가 간직하여 두었던 것인데 금번 특히 옥중에 있는 그의 뜻을 받아 본보에 위촉하여 게재케 되었다"고 원고 입수 경위를 밝혔다.

대련·여순 감옥에서 두 차례 인터뷰

조선일보 1931년 6월 10일자에 실린 ‘조선사(조선상고사)’ 첫 회(위), 신채호의 옥사 사실을 알린 1936년 2월 23일자.

'조선상고문화사'는 우리 문화·풍속 등을 주로 다뤘다. 제1편에서 '고구려' '고려' '발해' '한' '조선' 등 역사에 나타난 우리 민족 여러 나라 이름의 유래를 고증하면서 글을 시작했다. 고리·고려·고구려는 단군조선의 중부(中部)인 계루(桂婁)와 같은 뜻으로 우리말로 가운데를 의미하는 '가울이'에서 온 것, '용비어천가'에서 바다를 '발알'이라고 했는데 발해의 뜻과 같다, 우리말에서 첫째를 '한아(하나)'라고 하는 것에서 '한'을 취한 것이다 등 나라 이름의 뜻을 여러 문헌을 통해 고증했다.

조선일보는 이후 신채호가 쓴 '만리장성은 뉘 것이냐'도 1932년 12월 9일부터 14일까지 5회에 걸쳐 연재했다. 신채호의 '조선사'는 나라 잃은 식민지 국민에게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를 알리며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글이었다.

조선일보는 두 차례에 걸쳐 옥중 신채호를 인터뷰하고 이를 지면에 실어 영어(囹圄)의 몸이 된 독립운동 지사의 소식을 전했다. 첫 인터뷰는 체포 직후 대련(다롄) 감옥에서였다. 조선일보 특파원 이관용(1891~1933)은 대련 감옥에서 신채호를 만난 뒤 1928년 11월 8일 자에 '대련 감옥에서 신단재와 면회'를 실었다. 이관용은 영국 옥스퍼드대를 나와 스위스 취리히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연희전문 교수를 지낸 엘리트 지식인이었다. 그는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조선일보 특파원 신분으로 중국을 드나들었다. 이관용은 "붉은 벽돌로 지은 거대하고 보기 싫은 감옥"에서 신채호를 만났다고 적었다. 신채호는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할까 걱정하는 이관용을 오히려 안심시키고 책을 넣어달라고 주문했다. 그가 요청한 책은 H.G. 웰스의 '세계문화사', 윤휴의 문집인 '백호집', 그리고 국제어인 '에스페란토 문전(文典)'이었다.

결벽하고 겸손했던 민족사학자

신채호는 1928년 5월 대만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돼 1930년 5월 '치안유지법' 등 위반으로 10년 형을 받고 대련에서 여순(뤼순)감옥으로 이송됐다. 두 번째 인터뷰 기사는 '조선사'와 '조선상고문화사' 연재 직후인 1931년 12월 19일부터 12월 30일 자까지 7회에 걸쳐 실렸다. 사회부 기자 신영우(1903~?)가 여순감옥에서 신채호를 만나고 쓴 '조선의 역사 대가 단재 옥중 회견기'다. 신영우 기자는 1925년 무정부주의 흑기연맹 사건으로 복역하고 스물여섯 살 때인 1929년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신채호는 인터뷰에서 "('조선상고사' 연재를) 중지시켜주었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내가 지금까지 비록 큰 노력을 하여서 지은 것이라 하나, 단정적 연구가 되어서 도저히 자신이 없고, 완벽된 것이라고는 믿지 아니한다"는 이유였다. 결벽하고 겸손한 신채호의 성격이 드러난다. '신채호의 사회사상 연구'를 쓴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신채호가 학문적으로 얼마나 성실하고 겸손했으며 엄격했는가를 잘 알 수 있다"면서 "신채호의 이 저작들은 국민에게 큰 감명을 주고 환영을 받았으며, 신채호의 사학자로서의 진면목이 전 국민에게 다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했다.